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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역사) 이야기

대장부가 아내 하나 못 먹여

by 까망잉크 2008. 9. 1.

 

사나이 대장부가 아내 하나 못 먹여

이위경(李偉卿)의 쓰라린 절규

 

 

광해군이 임금으로 있을 때, 권력을 쥐고 있던 이이첨(李爾瞻) 일파에 의해 선조 계비(繼妃) 인목대비를

폐하여야 한다는 폐모론이 크게 외쳐지고 있을 무렵, 이위경은 성균관 유생으로 있으면서 폐모론을

결코 용납할 수 없는 일이라고 하며 극력 반대했다. 

이렇게 해 이위경은 탄압을 받고 어려움을 겪으며 남산 밑 산골짜기 오두막집에서 가난하게 살고 있었는데,

하루는 아내가 멀리 나가 남의 집에서 일을 해주고 쌀겨를 얻어와 음식을 만들려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보니 땔나무가 없기에, 근처 산에 가서 마른나무를 잘라 와 도끼를 들고 쪼아 자른다는 것이,

그만 실수하여 손가락을 찍어 손가락 여러 개가 잘라져나갔다.

아내는 곧,

“아이고! 아야!”하는 외마디 소리와 함께 기절해 쓰러졌고, 손에서는 온통 붉은 피가 범벅이 되었다.

책을 읽고 있던 이위경은 아내의 찢어지는 것 같은 외마디소리에 놀라 문을 열어보니

아내는 말도 못하고 쓰러져 있는 것이었다. 재빨리 달려가 아내를 안고 들어와 헝겊으로 손을 동여매고

피가 멎기를 기다리며 아내를 껴안고 서러움이 복받쳐 한없이 눈물을 흘렸다.

이위경은 찢어지는 것 같은 가슴을 억누를 길이 없었고, 격렬하게 소용돌이치는 정신적 갈등을 느끼면서

통곡이 절로 나왔다.

“이게 아니지! 사나이 대장부가 아내 하나 못 먹여 살리고서 독서는 해서 무엇한담?

이러고서 무슨 출세를 바란단 말인가?”

이렇게 탄식하고, 아내를 위로하며 하루 밤을 지샜다.

그러고 이튿날 새벽에 바로 헤진 도포를 아무렇게나 걸치고 이이첨의 집으로 달려가서,

아내의 부상을 이야기하고 협력할 것을 제의했다.

이에 이이첨은 이위경의 손을 잡고 크게 반겼고, 즉시 종을 시켜 양식과 고기를 실어 이위경의 집으로

보내주었다. 이후로 이위경은 이이첨의 심복이 되었고, 그의 지시를 받아 인목대비를 폐하여

감금 생활을 하도록 하는 일에 앞장서서 크게 활동했다.

그로부터 이위경은 이이첨의 신임을 얻어 급제도 하고 벼슬이 부제학에 이르렀으며,

이후 6,7년 동안 부귀를 누리면서 잘 살았다. 그러나 운명의 장난은 인생살이를 그렇게 쉽게

결론 내 주지를 않았다. 이위경이 선택한 길은 정상적인 길이 아니고 위험한 길이었음에 틀림없었다.

이위경의 행운도 잠시뿐, 인조반정이 일어나니 이이첨은 몰락하게 되었고,

따라서 이위경에게도 위기가 닥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위경이 극형을 선고받고 수레를 타고 사형장으로 나아가니, 많은 구경하는 사람들이 연도에

나와 침을 뱉고 손가락질을 했다.

이때 이위경은 시름없이 눈물을 쏟으며 손가락질하는 구경꾼을 향해 이렇게 말했다.

“세상사람들이여, 부디 배고픔 참는 훈련을 쌓아두시오. 내 아내의 잘린 손가락을 보고 참아 견딜 수가 없어서, 절조를 지키지 못하고 이이첨에게 달려갔다가 이 지경이 되었소.”

이와 같이 외치고 고개를 떨구니, 그를 아는 사람들은 그 재능을 못내 아쉬워했다.

이위경은 뛰어난 선비였는데, 배고픔을 참지 못하여 이러한 끝맺음을 하게 되었다.

후회와 한탄으로 죽음을 맞이했으니 뒷사람들에게 경계가 될 만한 일이로다.

한국인 이야기〉제5권,p.20 출처: http://www.gojunlife.com/

 

위 이야기를 보면서, 우리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야 잘 사는 길인지를 곰곰 생각해 보게 된다.

물론 사람은 각자 인생관이 다르고 생활 방식이 같지 않기 때문에, 일률적으로 어떻게 사는 것이

올바르다고는 단적으로 규정하기 어렵지만, 우리 전통 관념에 의하면 도덕규범에 벗어나지 않고

뒷날 사람들에게 손가락질 당하지 않게 사는 것을 바르게 사는 길이라고 여겨왔다.

하지만, 아내의 잘린 손가락을 보면서도 큰소리 칠 사람이 과연 몇 사람이나 있으며,

사랑하는 아내가 베갯머리에서 울며 호소하는 부탁을 뿌리칠 강심장 또한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출처] 사나이 대장부가 아내 하나 못 먹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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