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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역사) 이야기

나의 열 가지 즐거움

by 까망잉크 2008. 11. 11.

 

 

나의 열 가지 즐거움

 


 
한가하게 거처하는 즐거움은 다른 것이 없다. 아침 일찍 일어나 세수하고 양치질한다. 집안을 물 뿌리며 비질하고, 아침해가 비쳐들면 향로를 비로소 피운다. 책상을 정돈하고 책을 펼쳐 되풀이해서 읽고 생각에 잠긴다. 그러다 옛 사람이 마음을 쏟은 곳을 엿보기라고 하면 이 가운데 즐거움이 있다. 말로 형용하기는 어렵고 가만히 혼자 알뿐이다.
 
이만부의 〈한가로운 생활의 즐거움〉이란 글이다. 이 바쁜 세상에서 무슨 태고적 잠꼬대 같은 소리냐고 하겠지만, 그 투명하고 해맑은 아침의 정경이 그립게 떠오른다. 사실 우리의 삶이 이럴 수만 있다면 그보다 더 복될 것인가? 청나라 사람 섭혁포(葉奕苞)도 〈나의 열가지 즐거움〉이란 글을 남겼다.
 
의리서(義理書)를 읽고, 법첩의 글자를 배운다. 마음을 맑게 하여 고요히 앉고, 좋은 벗과 청담을 나눈다. 작은 술잔에 얼근히 취하고, 꽃에 물주며 대나무를 심는다. 거문고를 듣고 학을 완상하며, 향을 사르고 차를 끓인다. 배를 띄워 놓고 산을 바라보고, 바둑과 장기에 마음을 부치기도 한다. 이 열 가지 외에 비록 다른 즐거움이 있다 해도 나는 바꾸지 않겠다.
 
이른 아침 마당을 쓸고, 향을 피어 마음을 쓸고, 조용히 앉아 침묵을 깃들인다. `징심정좌(澄心靜坐)`, 즉 마음을 맑게 하고 고요히 앉는다는 말이 마음에 닿는다. 정작 우리네 삶의 자리는 어떤가? 번잡한 세사에 치어 집에 돌아가 밥 먹고 TV를 보면서도 이런저런 생각만 어지럽고, 꿈자리에서조차 낮에 하던 일이 계속된다. 아! 고단한 하루여.
 
김창흡도 〈예원(藝園)의 열 가지 취미〉란 글을 남겼다.   
 
벼랑 위 절에서 한해가 저무는 때 눈보라는 온 산에 섯거치고, 밤은 찬데 스님은 잠이 들어 혼자 앉아 책을 읽을 때.
봄가을 한가한 날 높은 산에 올라 멀리 보니, 몸과 마음이 가뿐하여 시상이 솟구쳐 오를 때.
꽃 지는 시절 문을 닫아 거니 주렴 밖에선 새가 울고, 술 동이를 새로 열자 싯귀조차 마음에 꼭 맞을 때.
굽이진 물 위로 술잔을 띄워 놓고 어른 젊은이 할 것 없이 한 자리에 다 모여서, 술 한 잔에 시 한 수로 어느 새 책 한 권을 이뤘을 때.
좋은 밤은 맑고도 고요한데 밝은 달이 마루로 들고, 부채를 치며 글을 외우니 소리 기운이 유창할 때.
산천을 두루 돌아 말도 종도 지쳤지만, 안장에 걸터 앉아 길 가며 읊은 것이 작품 되어 주머니에 가득할 때.
산에 들어가 책을 읽다 목표를 채워 집에 오니, 마음이 충만하고 기운이 철철 넘쳐 붓을 내달림에 신명이 든 듯 할 때.
멀리 있던 좋은 벗을 갑작스레 맞닥뜨려, 그간의 공부를 하나하나 물어보고 요새 지은 새 작품을 외워 보라 권할 때.
기이한 글과 희한한 책이 벗의 집에 있단 말을 듣고, 종을 보내 빌려 오게 해서 허둥지둥 포장을 끄를 때.
숲과 시내 건너편에 살고 있는 좋은 벗이 새로 빚은 술이 익었다고 알려오며 시를 부쳐 나에게 화답하길 청할 때.
 
그는 바로 이런 순간들이 건조한 삶에 정취를 더해주고, 기쁨으로 빛나게 해준다고 했다.  글을 읽다 보니 나는 그 사람을 알 수 있을 것만 같아 빙그레 웃음이 지어진다. 삼동을 산사에서 책 읽으며 지낼 때, 추운 밤 홀로 깨어 책 읽는 소리, 가끔씩 버석 하며 추녀 끝 고드름이 떨어진다. 깊은 밤 책 읽는 내 모습이 궁금했던걸까? 달빛이 슬며시 마루 위로 걸어 올라온다. 나는 난데 없는 구경꾼을 만나 더 신이 나서, 쥐고 있던 부채로 장단을 맞추며 목청을 한껏 돋운다. 친구가 편지를 보내 왔다. "지난 번 빚은 술이 잘 익었네. 기분 좋아 시 한 수 지었지. 화답하시게. 자네 시가 내 마음에 들면 청해서 함께 마실 터이고, 그렇지 않으면 나 혼자 다 마시겠네. 어쩔텐가?"
 

이제 와 이런 즐거움을 직접 누릴 수야 없겠지. 하지만 옛글을 읽다가 잠시 곁길로 빠지는 이런 행복한 생각이라도 함께 할 수 있으니, 나는 그것이 기쁘다. 팍팍한 세상을 건너가다가 뜻하지 않게 만나는 짧은 순간들로 하여, 이 인생이 새로운 원기로 충만해진다. 나도 나의 열 가지 즐거움을 한번 손꼽아 볼거나 ?

 


 

 


정민 교수의 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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