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철교(漢江鐵橋)
한강철교(漢江鐵橋)는 한강의 교량 중 최초로 건설된 교량[1]으로, 노량진역과 용산역 사이를 잇는 철교이다. 1900년 한강 이남으로 노량진역에서 끊겨 있던 경인선을 용산역과 남대문역(현 서울역)까지 연장하기 위하여 건설된 철도 전용 교량이다. 현재 경인선, 경부선등의 열차가 이용하는 교량이다.
한강철교는 A, B, C, D선의 4개 교량으로 구성되어 있다. A선과 B선은 단선교량이며, C선과 D선은 복선교량이다.
각각의 구간을 지나는 열차는 다음과 같다.
- A선: 경인선 급행, 경부선 A급행(용산 - 천안), 광명 셔틀, 경원선·용산선 이용 화물열차 (용산역 방향)
- B선: 경인선·경부선 급행열차, 경원선·용산선 이용 화물열차 (노량진역 방향)
- C선: 경부선·호남선·전라선·장항선 KTX·새마을호·무궁화호, 경부선 B급행(서울 - 천안), 일부 화물열차
- D선: 수도권 전철 1호선
대한제국과 일제 강점기에 건설된 A·B·C선은 2006년 대한민국의 등록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처음에 정부와 정식으로 교량 건설 계약을 맺은 사람은 미국인 제임스 모스였다. 그는 경인철도 부설권과 함께 교량 가설권도 획득했다. 처음 계약에 따르면 보행자의 편의를 위해 다리 한쪽이나 양쪽에 보도를 만들어야 하며, 선박의 운항을 위해 개폐부를 만들거나 충분히 높게 가설하도록 규정했다.
1897년 3월 29일 기공식을 올리고 철도 공사가 시작되었으나 곧 인력난과 재정난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그에 더하여 일본의 압력으로 위협을 느낀 모스는 철도 부지의 토목 공사가 끝날 무렵 일본에 부설권을 일본에 넘긴다. 일본은 계약을 인수한 뒤 공사비가 많이 든다는 이유로 보도 가설을 하도록 된 계약을 파기한다. 일본은 인력난으로 시일을 끌다가 1900년 7월에야 완공한다. 완공 당시 한강철교는 근대식 토목 공사로는 가장 규모가 컸다.
한강철교에는 교각이 9개였는데, 모스가 그 가운데 제1, 2, 9호 교각을 만들었으나 일본이 안전도 검사를 한 뒤 위험하다고 판단하여 다시 가설했다. 모스가 만든 교량의 양 기둥으로 그대로 사용했다. 철교를 만들 때 들어간 재료는 철강이 1,200톤, 벽돌이 120만 장, 시멘트가 5천 포, 석재가 5만 개 이상이며, 상부구조를 이루는 철재는 61미터짜리로 미국산이었다. 완성된 교량은 628.9미터였고, 교각은 위쪽을 뾰족하게 하여 장방형으로 만들었다. 아래 둘레는 8.2미터, 폭은 2.1미터였고, 위쪽 둘레는 7.6미터, 폭 1.8미터이며, 교각의 수면 위 높이는 11.2미터였다. 북쪽 교대는 1925년 대홍수 때 유실되어 다시 세웠다.
경인선 및 한강철교가 개통되기 이전에는 서울에서 인천까지 육로로 12시간, 배편으로 8시간이 걸렸으나, 완공 뒤에는 1시간에서 2시간이 걸렸다. 철교는 그때까지 나루터였던 곳이었으며, 일본인에 대한 반감으로 나룻배를 계속 이용하는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원래 계약에 있었던 보도 설치는 1917년 인도교(人道橋, 현 한강대교)가 가설됨으로써 이루어졌다.[1]
연혁
- 1897년 3월 29일 : 기공식
- 1900년 7월 5일 : A선 개통
- 1912년 9월 : B선 개통
- 1944년 8월 1일 : C선 개통
- 1950년 6월 28일 : 한국 전쟁으로 A·B·C선 폭파
- 1957년 7월 : C선 복구
- 1969년 6월 : A·B선 복구
- 1994년 12월 : D선 개통
|
|||
출처:위키백과,다움.
| |||
1945년 10월 서울 한강철교 |
|||
1945년 10월 서울 한강철교
|
|||
'한강의 대교(大橋)들'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마포대교 (麻浦大橋) #6 (0) | 2009.02.20 |
---|---|
한남대교(漢南大橋) #5 (0) | 2009.02.18 |
양화대교(楊花大橋) #4 (0) | 2009.02.16 |
광진교(廣津橋) #3 (0) | 2009.02.15 |
한강대교(漢江大橋) #1 (0) | 2009.02.08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