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효자를 삼년 동안 업어 모신 호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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孝 子 里
몇 십 년 전만 해도 우리나라의 산은 숲이 우거져 있었고, 산골짜기마다 옥같이 아름다운 물이 사철 흐르고 있었다.
나무가 울창하고 숲이 우거진 반면에 깊은 산골짜기에는 호랑이도 많이 살았다. 호랑이는 성이 나면 남의 집 삼대독자도 물어 가고 첫날밤을 지내는 신방을 부셔버리기도 하지만, 그러나, 호랑이는 신령스럽기도 한 동물이어서 효자, 열녀 같은 의로운 사람은 마음껏 도와줄 줄 아는 슬기로운 동물이라, 사람들은 호랑이를 숭상하고 때로는 신(神)처럼 위해 바치기도 하는 것이다.
이조 중엽의 일이었다. 한양 사는 박태성은 효성이 지극하기로 이름이 높던 사람이었다. 연노(年老)한 박태성의 부친은 효성스런 아들의 공경으로, 아무런 불편 없이 나날을 보내던 끝에 수명이 다하여 세상을 떠났다. 박태성은 경기도 고양군 신도면, 북한산 기슭의 양지 바른 곳에 부친의 묘소를 쓰고, 돌아가신 후까지도 날마다 한 번씩 묘소를 찾아 참배하는 일을 잊지 않았다.
서울 문안에서 북한산까지 가자면, 무학재, 녹번고개, 박석고개 등 여러 고개를 넘어야 했다. 그렇다고 지금처럼 신작로가 나 있는 것도 아니요, 지척을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숲이 울창한 험한 길이었지만, 박태성은 왕복 오 십리 길을 하루도 빠진 일이 없었다. 더구나 산 속엔 산적이 우글거리고, 호랑이도 나타나는 곳이었는데, 효심이 지극한 박태성에게는 그러한 것들이 두려운 존재가 되지 못했다.
어느 겨울,
눈보라가 치고 폭풍이 휘몰아치는 추운 날이었다. 그날도 박태성은 차비를 차리고 문을 나서려 할 찰나다.
박태성의 부인은 심상치 않은 예감이 들었든지, 날씨도 고르지 못하니 하루만 쉬라고 만류했으나,
“내 몸이 본시 부모님의 은공을 입어 세상에 태어났으니, 어찌 몸을 아껴 자식 된 도리를 잊어서야 되겠소. 내 곧 다녀오리다.”
박태성은 한사코 길을 떠났다.
워낙 효성이 지극한 박태성인지라, 현숙한 부인도 그를 막을 재간은 없었다.
박태성은 눈을 맞아가며 단숨에 서대문(西大門)을 나서 경기감영을 지나 모화관에 이르렀다. 몹시 춥고 숨이 찼다. 박태성은 눈에 쌓인 무학재를 넘을 길이 아득하게 느껴졌다.
“이를 어쩔꼬! 눈이 저렇게 많이 쌓였으니 재를 넘기 어려우리라.”
눈보라가 더욱 세찼다.
그렇다고 하여 자식 된 도리로써 어찌 부친의 산소에 곡하기를 궐할 수 있으랴, 박태성의 효심에는 변함이 없었다. 눈에 파묻혀 죽는 한이 있어도 갈 수 있는 데까지 가야 마땅하다고 생각했다.
박태성은 계속 고개를 넘어 눈 숲을 헤치고 걷기를 쉬지 않았다. 어느덧, 숨이 차고 기진맥진해서 몸을 가눌 수가 없었다.
눈보라는 더욱 세차고, 어디선가 까마귀 우는소리가 불길한 예감까지 던져 주는 것이었다.
“내, 여기서 쓰러지다니 불효막심이로다. 아버님. 불효막심이옵니다. 아, 버, 님.”
박태성은 그만 몸을 가누지 못해, 무악재 깊은 숲 길길이 쌓인 눈구덩이에 쓰러지고 말았다. 이제는 별수 없이 추위에 얼어 죽거나 사나운 짐승의 밥이 되는 판이다.
혼수상태가 되면서도, 박태성의 마음은 항상 부친의 묘소에 가 있었다.
때 마침 먹을 것을 구하러 돌아다니는 호랑이의 애잔한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아니나 다를까, 집 채만한 호랑이가 사람 냄새를 맡고 어슬렁거리며 다가왔다.
이미 정신을 잃고 눈구덩이에 쓰러진 박태성이야 그것을 알 리가 없었다. 이제 별 수 없이 박효자는 호랑이의 주린 창자를 메꾸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상한 일이다. 호랑이는 앞발을 들어 박효자를 흔들어 깨우는 것이 아닌가.
소스라치게 놀라 정신이 든 박효자는 냉담하게 호랑이를 꾸짖기에 이르렀다.
“호랑이 듣거라! 호랑이는 자고로 신령한 짐승으로 일컬어 왔거니, 네 어찌 부모의 거상을 입은 상제를 해치려 하느냐?”
그러자, 호랑이는 무슨 생각이 들었든지 곧장 박효자 앞에 넙죽히 엎드리는 것이었다. 우선 해치지 않겠다는 뜻인 줄은 알았으나, 어떻게 하라는 말인지 도무지 호랑이의 마음을 알 수가 없었다. 호랑이는 엎드린 채로 두 어깨를 자꾸 흔들기만 했다. 필시 자기 등에 업히라는 뜻이었다.
“나더러 네 등에 업히란 말이냐?”
호랑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급기야 호랑이의 등에 업힌 박효자는 두려움과 희열이 엇갈렸다. 박효자를 등에 업은 호랑이는 바람을 일으키며 날쌔게 달렸다.
박효자는 한편 두려웠다.
“네 이놈 나를 업고 어디로 뛰는 것이냐.”
호랑이는 염려할 것 없다는 듯이 가볍게 '허흥' 소리를 몇 번 낼뿐이었다.
호랑이는 단숨에 박효자를 그 아버님 무덤 앞에 업어다 주었다. 호랑이의 도움을 받아 수십리길을 편히 온 박효자는 무덤 주의의 눈을 말끔히 쓸고 엎드려 아뢰었다.
“아버님, 눈 내리는 산골에 홀로 누워 계시기 쓸쓸하지나 않으십니까? 오늘은 요행 호랑이의 도움을 받아 무사히 왔습니다만, 눈 길이 험준하여 돌아갈 길이 아득하여이다. 제 목숨을 아낌이 아니 오라 아버님 삼년상도 마치지 못하고 변이라도 당하는 날이면 그것이 안타깝사옵니다.”
박효자는 통곡 삼배하고 일어나, 돌아갈 길을 생각하니 까마득했다.
눈이 쌓이니 굴속에 숨어있던 갖가지 짐승들이 먹을 것을 찾아 헤매 다니며 울부짖는 소리가 요란했다. 울 때는 요행히 호랑이의 도움을 받아 무사했지만 돌아가는 길에 곰이나 승냥이 같은 짐승을 만나면 여지없이 산짐승의 밥이 되기 마련이다.
두렵기 한이 없었다.
이 때, 숲 속에 몸을 감추고 있던 호랑이가 소리를 내며 박효자 곁으로 다가왔다.
“호랑아 네가 여기 있었구나.”
이제는 두렵지 않았다. 호랑이의 호의를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호랑이는 박효자를 등에 업어 가지고 눈 속을 뚫고 무학재에 내려 주고 갔다.
이런 일이 있은 후 호랑이는 박효자가 올 시간을 기다려 매일 같이 업어다 주는 것이었다. 이렇게 박효자는 호랑이의 호의로 삼년 동안 효성을 다할 수 있었고, 마침내 거상을 벗게 되었다.
마지막 대상 날이 되었다. 박효자는 집에서 제사를 지내고 날이 밝자마자 부친의 묘소를 찾았다. 호랑이는 전과 같이 박효자를 업어다 주고 무덤 뒤 숲 속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박효자는 호랑이의 등을 두들겨 주면서 감사의 말을 전했다.
“호랑아 너의 도움으로 아버님 삼년상을 마치니 고맙기 짝이 없다. 내 무엇으로 네 은공을 갚아야 좋을지 알지 못하겠구나.”
박효자의 말에 호랑이는 부드럽게 울음소리를 내면서, 등잔만한 두 눈으로 주루룩 눈물을 흘리는 것이었다. 고개를 숙이고 구술퍼하는 호랑이의 표정은 지극히 유순하기만 했다. 호랑이는 오히려 박효자의 효행에 감동하고 있었다.
“호랑아, 너와 나와는 서로 말은 통하지 않으나 마음은 서로 아느니라. 내 죽는 날까지 너를 잊지 않을 것이요. 죽으면 이곳에 묻힐 것이니 부디 잘 지내거라.”
호랑이와 박효자의 작별은 인간 세상에서 볼 수 있는 아귀다툼, 그것이 아니었고 자못 애절한 정경이었다. 박효자와 호랑이는 끌어안고 서로 얼마를 울었는지 모른다.
그런지 몇 달 후였다. 그 동안 상을 당하여 악의악식(惡衣惡食)으로 추위와 더위를 가리지 않고, 효행을 다하다 몸이 쇠약해진 탓인지 박효자는 아직 여유 있는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본(本)은 밀양(密陽)이요, 자는 경숙, 벼슬이 통덕장에 이르니 정 五품이었다.
묘소는 박태성의 유언을 따라, 북한산 기슭 선영(先塋)아래 묻혔다. 옛날, 자기를, 올 적 갈 적마다 업어다 주던 호랑이와의 약속이기도 한 것이다.
이때부터 고양군 신도면에 있는 이 마을의 이름은 효자리(孝子里)가 된 것이다.
그런데, 박태성이 죽고, 졸곡이 지나자 효자리에는 또 한가지 이상한 일이 생겼다. 어느 날 아침 산에 올라가 박효자 무덤 근처에서 나무하던 젊은이 하나가 고함질렀다.
“이봐요, 모두들 와요. 호, 호랑이요.”
“야 뭐, 호랑이라구 이 바보야 얼른 뛰어 와. 물리면 큰일이야.”
“죽은 호랑이에요. 껍데기를 베껴 팔면 부자가 돼요.”
동리 사람들은 모두 산으로 올라갔다. 과연 커다란 호랑이가 쓰러져 죽어 있었다. 얼마 전, 박효자의 상여 행렬을 숲 속에 숨어서 지켜보며 눈물 지우던 호랑이는 급기야 박효자의 무덤을 찾아와 자결을 한 것이었다.
동네 사람들은 껍질을 벗겨 팔아 돈을 벌자고 흥분했다.
그 중에 침통한 표정으로 호랑이만 지켜보고 섰던 노인 하나가 정중히 얘기했다.
“껍질을 벗기지 말아라. 이 호랑이는 의리가 있는 영물이야. 이 무덤에 누워 계신 박효자를 삼년 동안 업어 모신 호랑이다. 이 호랑이는 박효자의 효성을 추모한 나머지 바로 그 무덤 앞에서 스스로 제 목숨을 끊어 돌아가신 박효자의 뒤를 따랐느니라.”
노인은 타이르듯 동네 사람들에게 말했다.
“그렇다면 할아버지! 이 호랑이는 사람보다도 의리를 잘 지켰으니 이대로 내버려 둘 순 없잖아요?”
“기특한 말이다. 자, 우리 힘을 합하여 호랑이의 넋을 박효자와 함께 있게 해 주자.”
동리 사람들은 박효자의 무덤 오른 쪽에 호랑이가 편히 누울 자리를 마련해 주었다 한다.
이 글은 한국고전문학전집(세종출판공사)에 실린 자료입니다.
출처: 한국고전의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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