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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역사) 이야기

[대한민국 제1호] 성냥공장

by 까망잉크 2011. 1. 31.

[대한민국 제1호] 성냥공장

인천 빈민 먹여살린 ‘조선인촌성냥공장’

‘불처럼 환하게 일어나라’며 집들이 선물로 인기를 끌었던 성냥. 구한말 시절에 인천·부산항을 통해 중국·일본제 성냥이 밀려오면서 생활필수품이 되었다.

우리나라에서 성냥은 1885년에 처음 만들어진 것으로 전해진다. 고종 때 외교고문인 뮐렌도로프의 주선으로 1885년 11월 독일미국인 조셉 로젠바움이 서울에 성냥공장을 만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싼 값의 중국·일본제 성냥에 밀려 파산하고 중국 상인에게 넘겼다는 것. 1900년 러시아 대장성이 발행한 ‘조선에 관한 기술(記述)’이란 보고서에는 ‘1886년 인천 제물포에 외국인들이 성냥공장을 설립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일본제 성냥이 범람해 생산이 중단됐다’고 되어 있다. 서울과 인천 중 어느 곳이 먼저인지는 아직 불명확한 상태다.

기록이 남아 있는 최초의 성냥공장은 1917년 10월 4일 인천 동구 금곡동(당시 금곡리)에 세워진 ‘조선인촌주식회사(朝鮮燐寸株式會社·사진)이다. 일본인 가래영태랑(加來榮太郞)이 사장이던 이 회사는 압록강 하류 신의주에 부속 제재소를 두고 목재를 배편으로 들여왔다. 신의주와 평양에도 공장을 두었던 이 회사는 1921년 직원들을 괴롭히던 일본인 지배인을 쫓아내기 위해 동맹파업을, 1931년에는 여직공 170명이 임금삭감에 항의하는 동맹파업을 잇달아 벌였다. 일본인 감독의 모욕적인 대우에 항거한 것이었다. 그러나 1921년에 550여명이 취업, 인천 극빈층을 먹여살리는 역할을 해 ‘동포를 사랑하면 수입 성냥 대신 조선제품을 사용하자’는 기사가 조선일보에 실리기도 했다. ‘패동(佩童)’,‘우록표(羽鹿票)’,‘쌍원표(雙猿票)’ 등의 상표로 하루 2만7000갑(국내 소비량의 약 20%)씩 생산하면서 1950년대까지 존속했다. 뒤이어 1920년 8월 대구 금정동에 (주)동아인촌(東亞燐寸)성냥공장이 생겨 대구지역 토호였던 장직상(張稷相)이 사장을 맡았다.

성냥공장은 이후 전국에서 우후죽순처럼 생겨나 해방 이후 인천에는 한국·대한·조선·평안성냥공업사, 대구에는 왕자·백구·사슴표·공작·닭표성냥공장이 들어섰다. 1970년대에는 공장이 300여 개에 달했다.

그러나 1980년대 들어 값싼 중국산 성냥과 일회용 라이터가 등장하면서 치명타를 입어, 지금은 경상북도 의성의 성광성냥 하나만 남았을 뿐이다.

 

출처: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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