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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역사) 이야기

[대한민국 제1호] 양말공장

by 까망잉크 2011. 2. 2.

[대한민국 제1호] 양말공장

소포로 부쳐주기도 한 10전짜리 양말

양말은 조선말 철종 때 서양 선교사들이 처음 선보인 것으로 알려졌다. 구한말에 수동식 양말 직조기계가 들어온 데 이어 1910년대에 자동식 양말기계가 들어왔다.

최초의 양말공장은 1906년 김기호(金基浩)씨가 평양에 세운 양말공장으로 알려져있다. 그러나 이 공장에 대해 전하는 기록은 없다. 기록이 남아 있는 것은 1909년의 서울 서상팔의 양말제조판매소와 김덕창의 중곡염직공소, 평양 손창윤의 삼공(三共)양말공장이다. 그러나 이 공장들은 같은 해에 등장했지만, 평양의 삼공양말공장은 일제 때 직공 850명을 둔 대규모 공장으로 컸다.

손창윤이 20세 때 평양 계리에 세운 삼공(三共)양말공장〈사진·원내는 손창윤〉은 창업 26년 만인 1935년에 자동식 양말 직조기계 110대, 수동식 기계 500대, 내의·장갑·타월·목도리를 짜는 기계 등을 갖췄다. 평양 최대 양말공장으로 공장 옆에 직접 판매소를 두기도 했다. 삼공양말은 전국적인 인기를 모았고 만주 등에도 수출할 정도였다.

서울의 중곡염직공소는 1909년 10월 황성신문에 ‘업무 대확장’이란 제목의 광고를 냈다. 일본에서 4년간 염색을 배운 뒤 1902년에 중곡염직회사를 만든 김덕창이 낸 광고였다. 삼합사(三合絲)양말을 10전, 모자를 45~50전에 판다며 다른 지역에서도 주문을 하면 소포로 부쳐준다고 소개했다.

서울 안현동의 양말제조판매소 주인 서상팔은 1909년 9월 황성신문에 ‘아(我)국에서 제조하는 양말’이란 제목의 광고를 냈다. ‘좋은 재료로 싼값에 파니 동포들은 속히 구매하라’는 내용이었다.

일제 당시 양말공장들은 임금 하락에 항의하는 파업이 잦았다. 부산에선 여공들이 퇴근 때 양말을 가져가는 것을 색출하기 위해 신체검사를 하자, 이에 항의하는 파업을 벌이기도 했다.

지금도 양말공장을 운영 중인 광주의 무등양말공장은 1935년 창립됐다. 무등양말은 조상원씨가 사장으로, 주주는 광주지역 유지 12명이었다. 이들의 목적은 독립운동 기금 마련이었다고 한다. 1930년대 신문을 보면 ‘양말은 살에 붙는 것으로 얼른 해지기 쉽습니다. 조금 신고는 곧 빨아서 다시 신는 것이 오래 신는 법입니다’라며 양말을 자주 빨것을 권했다.


 

출처: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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