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 유관순 열사 !
1919년
1월 22일 광무황제가 갑자기 서거하였다.
2월 8일 일본 동경 유학생 400여명이 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 모여 독립선언을 하였다.(2.8독립선언)
3월 1일 3.1운동이 발발하였다. 유관순은 학교 담을 넘어 서울 시위운동에 참여하고 학교로 돌아왔다.
3월 3일 광무황제 국장례가 거행되었다. 이날은 시위가 자제되었다.
3월 5일 서울에서 학생단 시위운동이 일어났다. 유관순은 이화학당 친구들과 함께 이 시위운동에
참여했다가 경무총감부에 붙잡혔다 풀려났다.
3월 10일 각급 학교에 휴교령이 내렸다.
3월 13일 서울에서 기차를 타고 고향 천안으로 왔다. 유예도는 이 때 학교 선배그룹으로부터 독립운동
자금모금의 사명을 받았다고 하였다.
3월 14~31일 유관순은 아우내 장터 만세시위운동을 준비하였다. 머리에 수건을 쓰고 각 부락을 다니면서
시위운동 참여를 권유하였다.
3월 14일 오후 4시 목천보통학교 학생 120명(목천 기미독립운동기념 사업회에서는 171명이라 함)이
교정에서 시위운동을 하였다.
3월 31일 유관순, 매봉산에 봉화를 올렸다.
4월 1일(음력 3.1) 아우내 만세시위 발발하다. 아버지 유중권, 어머니 이소제, 숙부 유중무, 속장 조인원과 함께
시위를 주도하였다. 오빠 유우석은 공주에서 시위운동에 참여하다 부상당해 붙잡혔다.
5월 9일 유관순은 공주법원에서 5년형을 받았다.
6월 유관순과 아우내 만세 주역들이 경성복심법원에 항소하였다. 이에 따라 유관순과 이들은
서대문감옥에 수감되었다.
6월 30일 유관순은 경성 복심법원 재판에서 3년형을 언도받았다. 유관순은 상고를 포기하였다.
다른 사람들은 고등법원에 상고하였다.
8월 29일 유우석은 공주법원에서 징역 6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9월 11일 유관순을 제외한 병천과 수신.성남지역 시위 주도자들의 상고가 고등법원에서 각각 기각되었다.
11월 6~11일 정동 제일교회에서 열린 기독교 미감리회 조선연회에서 천안지역 3.1운동 피해보고와 함께
수감 교역자에게는 20원, 기타 수감자에게는 5원의 구제금을 지급하기로 하였다.
1920년
3월 1일 오후 2시, 유관순이 서대문감옥에서 옥중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4월 28일 영친왕과 이방자 여사 결혼기념 특사령으로 형기가 절반인 1년 6개월로 단축되었다.
9월 28일 오전 8시 20분 모진 고문에 의한 방광파열로 서울 서대문 감옥에서 순국했다.
10월 12일 이화학당에서 유관순의 시신을 인수하여 수의를 해 입혔다.
유관순 열사를 지하 감방에 특별 수감하고 혹독한 고문을 자행했다.
日帝 유관순열사 순국뒤 시신토막, 옥중 여성열사들 성고문도 자행
유관순 열사의 시신을 여섯 토막내 보관한 석유상자
- 유관순열사의 마지막 유언 -
내 손과 다리가 부러져도
그 고통은 이길 수 있사오나,
나라를 잃어버린 그 고통만은 견딜 수가 없습니다.
"나라에 바칠 목숨이 오직 하나밖에 없는 것만이
이 소녀의 유일한 슬픔입니다........."
유관순 열사 초혼묘
이곳이 유관순열사의 초혼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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