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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것의 기록들

경희궁(5/5)

by 까망잉크 2016. 11. 14.

 

경희궁

경희궁 자정전과 뒷 뜰경희궁 [고궁 투어 5] 아픈 역사를 간직한 눈물의 고궁, 경희궁을 소개합니다.[고궁] 도심속의 휴식처 >경희궁<

 

 

소재지 서울특별시 종로구 신문로

 

건립시기

1617년(광해군 9)

 

본래 경덕궁(慶德宮)으로 불렸다. 처음 창건 때는 유사시에 왕이 본궁을 떠나 피우(避寓)하는 이궁(離宮)으로 지어졌으나, 궁의 규모가 크고 여러 임금이 이 궁에서 정사를 보았기 때문에 동궐인 창덕궁에 대하여 서궐이라 불리고 중요시되었다.

이 궁이 창건된 것은 1617년(광해군 9)으로, 당시 광해군은 창덕궁을 흉궁(凶宮)이라고 꺼려 길지에 새 궁을 세우고자 하여 인왕산 아래에 인경궁(仁慶宮)을 창건하였다. 그런데 다시 정원군(定遠君)의 옛 집에 왕기가 서렸다는 술사의 말을 듣고 그 자리에 궁을 세우고 경덕궁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광해군은 이 궁에 들지 못한 채 인조반정으로 왕위에서 물러나고, 결국 왕위는 정원군의 장남에게 이어졌으니 그가 곧 인조이다.

인조가 즉위하였을 때 창덕궁과 창경궁은 인조반정과 이괄(李适)의 난으로 모두 불타 버렸기 때문에, 인조는 즉위 후 이 궁에서 정사를 보았다.

창덕궁과 창경궁이 복구된 뒤에도 경덕궁에는 여러 왕들이 머물렀고, 이따금 왕의 즉위식이 거행되기도 하였다. 즉, 제19대 숙종은 이 궁의 회상전(會祥殿)에서 태어났고, 승하한 것도 역시 이 궁의 융복전(隆福殿)에서였다. 제20대 경종 또한 경덕궁에서 태어났고, 제21대 영조는 여기서 승하하였다.

제22대 정조는 이 궁의 숭정문(崇政門)에서 즉위하였고, 제23대 순조가 회상전에서 승하하였으며, 제24대 헌종도 숭정문에서 즉위하였다. 1760년(영조 36)경덕궁이던 궁명을 경희궁으로 고쳤는데, 그것은 원종의 시호가 경덕(敬德)이므로 음이 같은 것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창건 때 정전·동궁·침전·제별당·나인입주처 등 1,500칸에 달하는 건물이 있었다. 그 창건 공역은 1617년에 시작되어 4년 뒤인 1620년에 끝마쳤는데, 이 공사를 위하여 전국에서 공장(工匠)과 자재가 동원되었다.

그 뒤 1693년(숙종 19) 수리가 있었으며, 1829년(순조 29) 큰불이 나 회상전·융복전·흥정당(興政堂)·정시각·집경당·사현각 등 궁내 주요 전각의 절반 가량이 타 버렸다. 이듬해서궐영건도감(西闕營建都監)을 설치하여 소실된 건물을 재건하였다.

1860년(철종 11) 전각의 부분적인 수리가 있었으며, 마지막으로 1902년(광무 6) 일부 전각의 수리가 있었다. 이렇게 궁궐의 하나로 중요시되던 경희궁은 민족항일기에 건물이 대부분 철거되고, 이곳을 일본인들의 학교로 사용하면서 완전히 궁궐의 자취를 잃고 말았다.

이미 1907년 궁의 서편에 일본 통감부 중학이 들어섰고, 1910년 궁이 국유로 편입되어 1915년경성중학교가 궁터에 설립되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궁내의 건물은 철거되어 없어지거나 다른 곳에 이전되기도 하였고, 궁역(宮域)도 주변에 각종 관사 등이 들어서면서 줄어들었다. 대한민국정부 수립 이후 이곳은 서울중고등학교로 사용되면서 주변 대지 일부가 매각되어 궁터가 더욱 줄어들었다.

1974년 학교를 다른 곳으로 이전하고 전체 부지는 민간기업에 매각하였다가, 1984년 이곳에 시민을 위한 공원을 조성하기로 하여 이듬해 궁터의 일부를 발굴조사하였으며, 1986년부터 공원으로 개방하고 있다.

《궁궐지 宮闕志》에 따르면, 건물의 배치가 외전과 내전이 좌우에 나란히 놓이고 전체적으로 동향을 하고 있어, 정궁(正宮)인 경복궁과는 매우 다른 양상을 나타냈다.

즉, 경복궁은 남향으로 외전과 내전이 앞뒤에 구성되었는데 그것과 다르며, 또한 궁의 정문이 바른쪽 모퉁이에 있는 점도 특이하다. 이런 점은 처음 이궁으로 지어졌던 창덕궁에서도 보이는 현상으로, 의도적으로 경복궁보다는 격식을 덜 차린 결과로 보인다.

경희궁에는 수많은 전각들이 들어서 있었으나, 민족항일기에 궁 자리에 일본인 중학교를 세우면서 대부분의 건물이 사라지고, 일부는 다른 곳에 이전되어 지금까지 건물이 남아 있는 것도 있다. 우선, 현존하는 건물을 보면 정전인 숭정전의 정문인 흥화문, 후원의 정자였던 황학정(黃鶴亭) 등이 있다.

숭정전은 1926년조계사(曹溪寺)에 매각되어 현재 동국대학교 구내에 있는데, 정면 5칸, 측면 4칸의 단층 팔작기와지붕을 한 주심포양식의 건물이다.

현재 궁터에는 용비천(龍飛泉)이라는 샘터가 남아 있고, 숭정전 등 주요 전각의 기단이 그대로 남아 있다. 이 지역은 한동안 학교로 이용되어 새로운 건물이 들어서고 주변의 조경이 변모되고 지하 방공시설이 구축되는 등 약간의 변화가 있었으나, 옛 건물의 기단이 일부 남아 있고 전체적으로 궁궐의 지형이 잘 남아 있으며, 뒤쪽에는 울창한 수림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어 아직도 궁궐의 자취를 상당히 간직하고 있다.

경희궁은 일명 ‘야주개 대궐[夜照峴大闕]’로 불렸는데, 그것은 정문인 흥화문의 현판 글씨가 명필이었고, 글씨의 광채가 밤에도 훤히 비추었다고 해서 이 일대를 야주개라고 부른 데서 유래한다고 한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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