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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왕조 뒷 이야기

<조선왕조 뒷 이야기> 35 황희(黃喜)를 버려서는 안된다!

by 까망잉크 2018. 3. 11.

 

<조선왕조 뒷 이야기> 35 황희(黃喜)를 버려서는 안된다!

(주)하동신문

청백리의 상징적 인물 황희는, 공민왕12년(1363) 오늘날의 전라북도 장수군 수내면 선창리에서, 판 강능부사 황군서(黃君瑞)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용궁 김씨. 그는 여덟살 때부터 이색(李穡)·길재(吉再)의 문하에서 배워, 14살 소년 시절 왕족의 저택 복안궁의 녹사(綠事)로 공직의 길에 들어섰다. 요즘의 행정고시 격인 문과에 오른 것은 27세 때, 벼슬은 공양왕 등극과 함께 얻은 성균관학관, 오늘날의 국립대학 초급 관리직, 그러나 관운이 어긋나 나라가 망해 세상이 뒤집어 졌다. 그도 ‘충신은 두 왕조를 섬기지 않는다’ 윤리관에 젖어, 새 왕조를 거부하고 개성 근처 광덕산에 숨어 든, 이른바 ‘두문동 무리’에 끼이고 말았다. 그러나 황희는 나이든 고려 유신들이 “젊은이가 너무 아깝다! 백성들을 생각해서 젊고 유능한 사람은 나가 벼슬을 해야한다”며 등을 떠 밀었고, 태조 이성계(李成桂)의 간곡한 설득도 있었기에, 산에서 내려와 조선왕조에 몸을 실었던 것이다.복직한 황희는 태조의 발탁으로, 세자우정자(世子右正子)라는 요직에서 세자 훈육을  맡았다. 이때 세자가 뒷날 ‘왕자의 난’ 때 참살 된 방석(芳席)이었다. 한데 새나라 조선이 점차 틀이 잡혀 개국공신들이 판을 치니, 그는 미운 오리새끼처럼 변두리로 밀리고 말았다. 마침내 태조 까지 두문동에 들어가 애를 태웠던 황희를 흘겨 보더니, 그만 배겨나기 힘든 함경도 최북단 경원고을 향교 훈도라는 최 말단 자리로 내쫓아 버렸다. 명백한 인사탄압으로  그만 두면 좋겠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스스로 그만 둘 줄 알았던 황희가 묵묵히 일하며 자리를 지키자 태조는, 그를 중앙으로 불러 들여 뜻밖에 요직에 앉히더니, 같잖은 트집을 잡아 그만 파직시켜 버렸다. 진작 눈치를 챘던 황희였으나 그도 강건한 고집이 있었다. 그는 직위를 잃고도 조정의 시책을 낱낱히 살펴 잘못된 점에 대하여는 명쾌한 비판을 가해 조야에 칭송이 일었다.  이런 황희의 강직하고 양심적 식견이 민심을 끌어 황희의 인망이 들어나니, 태조는 다시 황희를 등용, 이번에는 약간 승진을 시켜 종6품 경원향교 교수관에 임명, 다시 먼곳으로 보내 끈질기게 괴롭혔었다. 하지만 황희는 태조의 꼼수에 넘어가지 않았다. 그는 위기를 기회로 삼아 2년여 변방에서 참고 일하며 국방에 대한 현실적 경험을 쌓고, 변방 민심과 서민 생활을 눈여겨 살펴, 열심히 실력과 경륜을 다지는 한편 오직 청렴과 성실로 직위를 지켰다.뒤에 정종 때 실권자 이방원이 그를 전격 발탁, 일약 경기도 도사(都事) 자리를 주니, 요즘의 경기도 부지사격이었다. 곧 왕권을 잡은 태종 이방원은 더욱 황희를 중용(重用)하려고 마음을 썼다. 창업에는 별로었으나  수성(守城)에는 필요한 인물로 보였던 것이다.그 무렵 나이 40에 이른 황희가 부친상을 당해, 법도에 따라 3년동안 관직을 쉬어야했다. 그러나 태종은 아무리 상중(喪中)이라도 무관은 출상 뒤 100일만 지나면 관직을 가질 수있다는 규정을 빌미로, 그를 일약 종3품 대호군에 특임시켜, 핵심 군·병권을 맡기니, 황희는 상복을 입은 채 군부의 요직에서 일했고, 곧이어 오늘날의 대통령실장격인 지신사(知申事)가 되어, 군왕과 머리를 맞대고 국정을 논의하는 권력의 핵심에 들었다. 그러나 양녕대군 폐세자를 직위를 걸고 반대, 태종과 뜻을 달리했다. 그러나 태종은 황희의 사람됨을 익히 아는지라 그를 진심으로 미워하지 않았다. 그를 고향 근처 남원으로 귀양 보내, 정적들의 공격을 피해 쉬도록했다. 황희는 귀양지 남원에서 큰 일을 했다. 그의 고조부 황감평(黃鑑平)이 후학을 가르치던 서당을 헐고, 그 자리에 누각을 지어 광통루(廣通樓)라 했는데, 뒤에 하동사람 정인지(鄭麟趾)가 광한루(廣寒樓)라 고쳐, 오늘날의 명승으로 전해 온다.태종이 상왕으로 나 앉으며 세종에게 왕권을 넘겼다. 태종은 귀양 보냈던 황희를 4년만에 풀어 도성으로 불렀다. 세종4년 황희는 태종을 찾아 엎드려 감사를 드리니, 태종은 세종에게 일렀다.“지난일은 어쩌다 그렇게 되었지만, 이 사람을 끝내 버릴 수는 없다. 나라를 다스리려면 이런 사람을 버려서는 안된다!”성군 세종과 죽이 맞은 황희는 87세로 은퇴하기까지 무려 73년간 공직을 지켰고, 그 가운데 정승 생활이 24년, 영의정을 1 8년간 지냈다. 문종2년(1452) 2월, 향년 90으로 세상을 뜨니, 오늘날의 경기도 파주 탄현에 그의 묘소가 마련 되었다. 그가 묻이던 날 임금 문종이 친히 장지 건너편 산에 올라, 고인의 하관 광경을 바라보고 통곡하였다는 이야기도 전해온다.                                              

 
 정연가(한국수필문학가협회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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