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 뒷 이야기> 45 왕비를 종으로 주시오
세조 2년(1457) 10월 24일, 강원도 영월 산골에 유폐됐던 노산군(魯山君-단종)이 죽임을 당해 주검이 처거운 강물에 던져지니, 이제 갓 어린티를 벗어난 17세 청소년, 지난 여름 두견새 소리 귀를 울리던 6월 첩첩 산중에 들어 왔다가 넉달만에 당한 일이었다. 그가 앞서 『설마 죽이기까지 할소냐!』하는 생각에 젖어 사뭇친 마음 달래며 읊은 시가 사람들의 가슴을 울린다.
一自寃鳥出帝宮
내 한번 원통한 새가되어 궁궐을 나오니
孤身雙影碧山中
짝없는 그림자 산속에 있구나
假眠夜夜眠無假
잠 못드는 밤 겹쳐도 잠이 아니오니
窮恨年年恨不窮
원한이 해를 거듭한다해도 한은 남으리
聲斷曉岑殘月日
울음 소리 그쳤더니 산엔 지는 달 희고
血流春谷落花紅
골짜기에 피 흐르듯 떨어진 꽃잎 붉네
天聾尙未聞哀訴
하늘은 귀가 먹어 이런 사연 모르련만
胡乃愁人耳獨聽
어쩌다 시름겨운 이들 홀로 귀 밝았는가.
이 시는 세조의 아우로 자신의 숙부가 되는 금성대군 이유(李유)가 자신을 다시 왕으로 복위시키려 일을 꾸몄다가 실패하고 말았다는 풍문을 전해 듣고 쓴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나 금성대군의 그런 바램이 노산군의 저승길을 재촉하는 빌미가 될 줄이야. 그리하여 노산군의 죄목은 반역의 수괴였다. 기록을 살펴보면 전말이 들어난다.
금성대군의 단종복위 음모사건 직후 좌찬성 신숙주(申叔舟)가 세조에게 고했다. “작년에 이개(李塏)의 무리들이 노산을 복위 시킨다는 명목으로 모의하였고, 지금 또 유(금성대군)가 변란을 일으키려하였으니, 노산은 편안히 있을 수가 없습니다!” 이에 세조가 답했다.
“의정부에서 의논해 오면 시행하자”
조금 뒤 영의정 정인지(鄭麟趾), 좌의정 정창손(鄭昌孫), 이조판서 한명회(韓明澮) 등이 신숙주와 함께 몰려와 세조를 졸랐다.
“노산이 반역의 주인이 되었으니 편안히 있을 수 없습니다!”
때를 같이하여 양녕대군이 노산군을 죽이라는 상소를 올렸다.
『노산군이 종사에 득죄하였으므로… , 유(금성대군)는 천하의 대역이니 사사로운 은혜로 법을 굽혀 용서 할 수없다』. 노산군과 금성대군을 요절내기를 촉구하는 상소였다.
단종처형을 들먹인 최초의 인물 가운데 한사람이 신숙주였던 셈이다. 신숙주는 세종이 가장 총애한 학자였다. 22세에 문과에 올라 훈민정음 창제에 깊히 역할했다. 그는 다섯 형제의 셋째였고 슬하에 여덟 아들을 둔 아버지였다. 세상을 궤뚫어 보는 안목이 남달라, 희미(稀微)한 대의명분 보다 확실한 현실을 택하여, 단종에 대한 의리를 소절(小節)로 여겼고, 권력을 휘어 잡은 세조를 대체(大體)로 봤던 실리주의 정객이었다. 멸문지화라는 위험을 안은 절의를 고집, 뻔히 보이는 영화를 외면 할 수없었다. 『여럿을 위해 나를 던진다』는 생각에서였을까, 그가 마음을 굽힘으로써 그의 가문은 당대를 누렸다.
신숙주의 맏형 맹주(孟舟)는 서윤(庶尹), 중형 중주(仲舟)는 군수, 아우 송주(松舟)는 부사, 막내아우 말주(末舟)는 처음에 숨었다가 뒤에 나타나 대사간, 전라도수군절도사를 지냈다.
신숙주의 장자 주(澍)는 관직이 알려지질 않았고, 차남 면(沔)은 함경도관찰사, 3남 찬(澯)도 관찰사, 4남 정(瀞)은 나이 20대에 이조판서에 올랐고, 5남 준(浚)은 이조와 공조의 판서를 거쳐 우참찬까지 올랐다. 6남 부(溥)도 관찰사, 7남 형(泂)은 내자시정(內資寺正), 막내 산(汕)은 성종의 사위로 부총관에 올랐으니, 신숙주 가문은 당대 융성의 극치였다. 신숙주가 성삼문(成三問) 등과 함께였다면 모두가 목없는 귀신이 될뻔했던 멸족의 대상들이었다.
그런데 신숙주는 속내를 알길 없는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노산군이 눈을 부릅뜬채 죽으니, 그가 남긴 왕년의 왕비 송씨는 18세 꽃다운 나이에 노비로 전락하고 말았다.
이때 신숙주가 세조에게 청을 넣었다. 노산군이 남긴 왕비 송씨를 종으로 달라고 요청한 것이다. 노산군을 저승으로 보내버리자고 맨 먼저 말한 것으로 알려진 신숙주가, 곧장 홀로남은 정순왕후를 달라했으니, 사람들은 신숙주를 변절의 대명사로 여겼다.
혹자는 신숙주가 불쌍한 처지에 빠진 정순왕후를 집에 온전하게 모시려했다는 옹호의 말을 하기도했다. 무릇 다스리는 위치에 오른자는 역사의 냉평(冷評)을 두려워 해야 한다.
세조는 신숙주의 청을 거부하고 송씨로 하여금 단종의 매부 정종(鄭悰)의 아들 정미수(鄭眉壽)를 맡아 기르도록 하니, 송씨는 온전히 몸을 보전, 정미수를 키우고 82세까지 살았다.
정연가 (한국수필문학가 협회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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