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 뒷 이야기>23 안타까운 공양왕의 운명
고려 34대 마지막 왕 공양왕(恭讓王)은, 공손하게 나라를 양보하여 넘겨주었다는 의미의 장난기 섞인 존호였다. 그의 이름은 요(瑤), 고려 20대 왕 신종(神宗)의 7대손, 정원부원군 왕균(王鈞)의 아들로 충목왕1년(1345)에 기구한 운명을 띠고 세상에 태어났다.
공양왕은 잘 살다가 45세 때인 1389년 11월 15일, 창왕(昌王)을 신돈(辛旽)의 핏줄이라며 들어내 버린, 이성계(李成桂)·심덕부(沈德符) 등의 어거지로, 탐탁찮은 왕이 된 것이었다.
그는 이미 국권을 틀어쥔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장’ 이성계의 꼭두각시가 될게 뻔한 임금 자리가 반가울리 없었다. 사실 왕실 근친에서 벗어난 그가 발탁 된 것은, 그의 아우 왕우(王瑀)가 이성계와 신덕왕후 사이에서 난 큰아들 방번(芳蕃)의 장인이라, 이를테면 권력자와 괄씨 못할 사돈인 점이 빌미가 된게 아닌가 싶었다.
반 협박에 눌려 억지로 끌려 나온 왕요가, 굳이 옥쇄 받기를 머뭇거리자, 형식상 왕실 최고 어른 공민왕비가, 왕요의 손을 끌어 당겨 옥쇄를 쥐어 주는 우스꽝스런 일이 벌어지기도하였다.
이리하여 임금이 된 왕요가 당일 바로 처결한 일은, 쫓겨난 우왕과 창왕을 서인으로 강등시켜, 우왕은 강릉, 창왕은 강화도로 귀양 보내는 일이었다. 왕요는 그저 이성계 일파의 새 나라 개창 준비 문서에 어보만 꾹꾹 눌러주는 일로 하루 하루를 넘겼다.
혹시 속에 있는 말을 할라치면, 권력의 중심에 똬리를 틀고 앉은 정도전(鄭道傳)·남은(南誾) 등 이성계 심복들은 대꾸는 커녕 히죽 거리기까지하였다.
그로부터 한달 뒤인 12월 14일, 임금 왕요는 마침내 정도전 등이 들이미는 우왕과 창왕을 죽이라는 교서에 어보를 누르니, 우왕은 강릉에서, 창왕은 강화에서 목이 졸려 저승 문턱을 넘고 말았다. 우왕은 새파란 청춘 26세, 창왕은 열살 철부지에 불과하였다.
공양왕 3년째인 1391년 1월 7일, 마침내 이성계는 삼군도총제사(三軍都摠制使)가 되어 군사통수권을 통째로 거머 쥐었고, 이듬해 4월 마침내 한가닥 희망이었던 외기둥 정몽주(鄭夢周)마져 넘어지니, 임금 왕요는 나라를 좋은 말할 때 공손하게 양보해야만 목숨을 부지할 수있겠다는 생각이 머리를 짓눌렀다.
그해 7월 17일, 바늘 방석 임금자리 3년 반만에 옥좌를 이성계에게 양보한 왕요는, 쫓겨나 8월에 공양군(恭讓君)으로 강등되고, 이어 아내와 태자 석(奭), 며느리를 거느리고 강원도 첩첩 산골 간성(杆城)으로 귀양을 갔다가 다시 삼척으로 옮겨졌다.
이성계 등극 3년(1394) 4월 17일, 참으로 엉뚱한 곳에서 공양군을 죽음으로 몰아가는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새 왕조에 불만이 있었던 동래현령 김가행(金可行)이란 자가, 심심풀이로 무슨 요행수가 없을 까 싶어, 밀양 땅의 앞 못보는 장님 점쟁이 이흥무(李興茂)를 찾아 갔다.
“점괘가 용하다는 말을 듣고 찾아 왔네, 왕씨들의 장래가 어떻게 될 것 같은가?”
김가행의 물음에 이흥무는 서슴치 않고 말했다.
“더 물을 것도 없오, 왕씨는 다시 일어납니다!”
“그래! 그게 언제 쯤일까?”
“멀지 않았오이다!”
참으로 기막힌 일이었다.
동래현령이 점집을 찾아 왕씨들의 장래를 점쳤다는 소문이, 새 왕조 정보망에 걸려 동향보고에 채록 되니, 가장 먼저 화살이 삼척에 처박혀 한적한 나날을 보내는 공양군에게 겨눠졌다.
강원도 삼척 두메 산골에서 낮이면 뻐꾸기 소리에 시름을 달래고, 밤이면 부엉이와 두견새 우는 소리를 자장가 삼아, 두 아들과 함께 쓸쓸하게 살아가는 왕년의 임금 왕요는, 죽어도 이렇게 어처구니 없게 죽을 줄은 꿈에도 생각하질 못했던 것이다.
하필이면 만물이 생동하는 봄날, 난데 없이 개경에서 달려온 중추부사 정남진(鄭南晋), 형조의랑 함부림(咸傅霖)이 “어명이오!” 하고 소리치니, 공양군은 까무러질 뻔 놀랐다. 정남진이 읽은 전지(傳旨)는 이랬다.
“경치 좋은 관동지방에서 여생을 편히 보내도록 했더니, 김가행과 이흥무 무리와 역모를 도모했으니 부득이 처형한다”
목숨을 내놔야 하는 공양군 처지에서는 천지가 뒤집힐 날벼락이었다.
이리하여 그들 3부자가 목졸려 죽으니, 공양군은 50세. 명색이 왕태자였던 큰아들 석은 영문도 모르는 소년이었고 그 아우는 갓난애였다.
그런 22년 뒤, 태종은 공양군을 공양왕으로 추봉하고, 무덤을 경기도 고양으로 옮겨 왕릉으로 격상 시켰는데, 참으로 부질없는 대접이었다.
정연가
'조선 왕조 뒷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조선왕조 뒷 이야기> 47「운명」을 이기는 「지혜」 (0) | 2018.03.22 |
---|---|
<조선왕조 뒷 이야기> 45 왕비를 종으로 주시오 (0) | 2018.03.16 |
<조선왕조 뒷 이야기> 35 황희(黃喜)를 버려서는 안된다! (0) | 2018.03.11 |
<조선왕조 뒷 이야기> 임진란 최초 의병장 (0) | 2018.03.08 |
조선왕조 뒷 이야기 (0) | 2018.03.07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