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 뒷 이야기> 47「운명」을 이기는 「지혜」
한때 세상을 바꾼 서민 대통령으로, 퇴임 후엔 고향 선후배들과 어울려 농사짓고 살고자했던 왕년의 최고 통치자가, 스스로 삶을 접으며 남긴 『운명(運命)이다』라는 말의 의미는 무엇이었을까? 사람들은 많이 울었다.
「민족적 민주주의」를 제시, 민주주의 보다「가난 극복」을 선택, 나라를 중흥시킨 통치자로 각인(刻印)된 고 박정희 대통령의 집권(執權) 꿈은, 만주 군관학교시절 길거리에서 어느 중국인 관상쟁이가 힐끗 쳐다보고 붓으로 갈겨 준, 『三軍叱咤之上將 治天下之大頭領-삼군을 호령할 장수로 세상을 다스릴 우두머리』라는 글귀를 머리에 새겼고, 꿈의 실현 단계였던 부산군수기지사령관시절 만난, 속칭 지리산 도사 박모 일등병의 사주풀이『제왕이 될 수있는「운명」의 소유자』라는 언급에 용기를 얻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중국인들은 어려서부터 『운명은 바꿀 수있다』고 배운다. 먼저 뜻을 세우는 입명(立命), 목표를 향해 노력하는 독행(篤行), 남을 이롭게하는 적덕(積德), 자신을 낮추는 겸양(謙讓), 마음을 다잡는 기도(祈禱), 이런 것을 갖추면 아무리 몹쓸 사주팔자를 지닌 사람도 운명이 바뀐다는 것이었다. 여기에 죽이 맞는 말이 곧『모든 것은 마음먹기에 달렸다』이다. 진리 중의 진리다. 이런 진리를 실천하는 힘이 곧 「지혜」다.
세조의 ‘멘토’로 벼슬이 좌의정까지 올랐던 권람(權擥)이 사윗감을 고르는데, 무신(武臣)으로 승승장구하던 남이(南怡)가 사위가 되겠다며 청혼하였다. 권람은 은근히 점장이를 찾아 남이의 점을 쳐보라했다. 점장이는 이윽고 말했다. “이 분은 반드시 나이 젊어서 죽을 것이니 좋지 못합니다!”며, 남이의 타고난 운명을 짚어 주었다.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던 권람은 곧 자기 딸의 신수(身手)를 살펴 달라했다. “이분은 젊어서 복록은 누리겠으나 매우 짧고 자식도 없습니다. 복은 누리고 화는 보질 못할 운명입니다!”. 점장이의 자신감 넘치는 예언이었다.
권람은 도리없이 점장이의 말에 무계를 두고 남이를 사위로 삼았다. 과연 남이는 27세때 공조판서에 오르고, 이듬해 한 나라의 병권을 거머 쥔 병조판서에 오르니 예사로운 출세가 아니었다. 따라서 그의 처 권람의 딸은 잘 나가던 남편의 모습을 바라 보며 『복된 삶』에 묻혀 살았는데 그만 먼저 세상을 뜨고 말았다.
28세 젊은 나이에 6경(六卿) 반열인 국방대신에 올랐던 남이의 죽음은 참으로 통탄스런 일이었다. 그는 태종의 외손자로 영의정 남재(南在)의 손자였다.
아버지 남휘(南暉)가 세종대왕과 처남 매부 사이였으니, 그의 출신 배경이 화려하기 짝이 없었다. 그는 특출한 용맹으로 17세 나이로 무과에 장원으로 급제했다. 충무공 이순신(李舜臣) 장군이 몇차례 낙방한 끝에 32세 늦은 나이로 무과 병과(丙科)로 급제한 일과 비교한다면, 남이는 참으로 조달(早達)한 셈이었다.
물론 국척(國戚)으로 특별한 대접이 있었을 것으로 보는 시각도 없지 않았으나, 그가 특별히 무과를 택한 점으로 봐서 그의 출중한 자질은 인정 할만했다.
남이의 타고난 용맹을 제대로 쓴 임금이 곧 세조였다. 왕의 목을 노리는 반란진압에 남이를 앞세웠고, 서북변의 여진족 토벌에서 남이는 적장 이만주(李滿住)를 참살하는 대공을 세웠다.
그러나 왕의 총애를 한몸에 받은 그는 겸양(謙讓)이 부족, 화를 자초했다고 역사는 기록했다. 급기야 그가 쓴 한편의 시가 화근이 됐다.
白頭山石 磨刀盡
백두산 돌 칼갈아 없애고
豆滿江水 飮馬無
두만강 물 말먹여 말리리
男兒二十 未平國
사나이 스무살에 나라 평정 못하면
後世誰稱 大丈夫
뒷 세상에 누가 대장부라 부를까.
참으로 남아다운 호방한 기질이 풍기는 명시(名詩)였는데, 사람들은 뜻이 너무 발호(跋扈)하여 평온한 기상이 없으니 화를 면하기 어려웠다했다.
세조가 그를 병조판서에 임명하자 드디어 세자였던 예종(叡宗)이 몹시 남이를 두려워하기에 이르렀다. 때를 같이하여 이조판서를 역임한 중추부사 한계희(韓繼禧)가, 세조를 찾아 은근히 “남이는 성질이 거칠고 사나우니 병권을 줄 수 없습니다!” 했다.
세조도 일리가 있다는 생각에서 남이를 곧장 해임시켜 버렸다. 세조가 죽고 예종이 즉위하니, 남이를 겁내던 예종의 속내를 읽은 천하의 모함꾼 유자광(柳子光)이 발빠르게 잇빨을 들어 냈다. 유자광은 남이가 쓴 시문 가운데 『未平國』을 『나라를 도모』할 뜻을 담은 구절로 트집, 모반으로 몰아 물어 뜯었다. 결국 그는 모진 고문 끝에, 『반역을 꾀했느냐?』는 예종의 닥달에 고개를 끄덕이고 삶을 포기하고 말았다. 겸덕(謙德)을 닦는 지혜가 있었더라면…, 참으로 아쉽다.
정연가(한국수필문학가협회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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