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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왕조 뒷 이야기

<조선왕조 뒷 이야기>19 최영과 이성계

by 까망잉크 2018. 5. 28.

<조선왕조 뒷 이야기>19 최영과 이성계
(주)하동신문  
                                          정연가 <前. 하동문화원장>

고려 우왕 14년(1388) 12월, 왕조 말기 이성계(李成桂)를 중심한 혁명세력에 의해, 73세 노구로 죽임을 당한 최영(崔瑩)은, 불과 십수년 전만 해도 이성계를 나락의 문턱에서 건져낸 인연이 있었다. 열아홉살 연장인 최영은 이성계를 출중한 후배 장수로 여겨 믿고 아꼈다.우왕 등극 초, 판삼사사(判三司事) 최영의 사가로 이성계의 4촌 형인 군기윤(軍器尹) 직위의 이천계(李天桂)가 찾아 와 은근히 고하는데, 들려준 말의 줄거리는 대개 이랬다.“저의 집안에는 근본이 틀어져 버린 일이 있습니다. 조부가 아들 둘을 두셨었는데, 장자 자흥(子興)이 곧 저의 아비였고, 차남 자춘(子春)이 성계의 아버지였습니다. 천호(千戶)로 계시던 조부께서 세상을 뜨자 저의 아비가 천호직을 이어 받았습니다. 한데 아버지가 두달도 안돼 그만 별세했습니다. 그때 소인은 아직 어린애라, 당시 동북면 관원들이 제가 장성 할때까지 숙부께서 천호직을 맡다가, 소인이 장성하면 제게물려 주도록 결정했었습니다. 그런데 숙부는 제가 장성한 뒤에도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가 갑자기 세상을 뜨니, 그만 성계가 대를 잇게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장유(長幼)의 순서가 뒤집어져 집안이 편할 날이 없습니다. 임금께서 소인의 숙부께 내리신 송천골 저택만 해도 임자가 바뀐게 아니겠습니까? 집을 탐내 하는 얘기는 절대 아니옵니다.”잠자코 이천계의 말을 듣던 최영은 묵묵 부답 말이 없었다. 그러자 이천계는 다시 이었다.“성계의 아버지는 반골(叛骨)이고, 성계도 반골입니다! 성계 휘하에서 날뛰는 퉁두란, 노명, 배주, 조무 등은 모두 오랑캐요, 성계가 화령에서 데리고 사는 계집은 바로 오랑캐 두목 나하추의 누이 동생입니다!”그러나 최영은 사사로운 욕심에 젖어 4촌을 해치려는 이천계의 말을, 국정에 끌어 들이고 싶지 않아 이렇게 대꾸하였다.“오랑캐 출신 장수들이 사지(死地)를 마다 않고 싸우고 있고, 인재를 귀히 여기는 것은 나라를 위하는 길이다, 또 아녀자 문제는 어디까지나 사사로운 일, 남이 따질 일이 아니다! 천호 벼슬은 토관(土官)이라 세습 할 수 있다. 오늘날의 화령부윤(和寧府尹:영흥목사) 이성계의 벼슬은 나라에 헌신하여 얻은 관직이지 결코 물려 받은 것이 아니다!”최영은 반 호통으로 이천계를 반박하였다. 푸대접에 멸시까지 당한 이천계는 이를 갈며 더 사나워졌다. 최영의 반응을 꼽씻어 더욱 변형된 언행으로 이성계의 오랑캐 내통 혐의를 윤색하여 정치 문제화 시켰다. 이리하여 결국 이성계는 최고 정무기관인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에 소환 당해 문초를 받게 되었다. 추궁 자리는 시중(侍中) 경복흥(慶復興)을 중심으로, 좌우에 이인임(李仁任), 최영이 앉고, 또 옆에는 임견미(林堅味), 염흥방(廉興邦) 등, 국권의 핵심들이 버티고 앉아 따졌다. 이성계는 그들의 힐책성 물음에 조목 조목 대답하니, 별반 탓할게 불거지지 않았다. 지켜만 보던 최영은 이인임 등의 트집성 문초가 못마당 한듯 퉁명스럽게 한마디했다.“오늘 물을 것은 다 물은 것 같으오!”그러자 이인임이 옆자리의 염흥방에게 이성계를 옥에 가두라했다. 이때 최영이 얼굴을 붉히며  “그리는 못하오! 이 자리의 수장 시중대감의 명령이 있어야 하오!” 이에 경복흥은 “옥에 가둘 필요는 없오! 이 장군은 재벽골 전장(田庄)에 돌아가 다음 지시가 있을 때까지 근신하면 될것이오!”하고, 최종 처분을 내렸다. 그로부터 석달 쯤 뒤, 최영이 시름에 잠겨 지내는 이성계를 찾았다. 맨발로 뛰쳐 나와 맞는 이성계에게, 최영은 함께 왜구를 치는 전쟁에 나가자 했고, 경복흥은 모든 혐의가 풀렸다는 편지를 이성계에게 보냈다.그런 한참 뒤 이천계가 살인죄를 저질러 죽게 되었다. 입 관리가 무겁던 최영으로 부터 들은 바가 없던 터라, 이성계는 뭣모르고 최영에게 제발 이천계를 살려 달라고 매달렸다. 그러나 최영은 “그 자는 죽어야 될 사람이다”며 고개만 저었다. 이성계는 집안일이라며 최고 실력자 경복흥을 찾아가 사정하다가, 경복흥으로부터 이천계가 자신을 모함하려 처음 찾은 이가 곧 최영이었음을 비로소 들었고, 최영이 이천계를 면박한 사실도 그때서야  알고 눈물겨워하였다. 그의 나이 41세 때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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