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 뒷 이야기>1 8 역사를 바꾼 세자의 난봉(주)하동신문
정연가 <前. 하동문화원장 >
태종1 8년(141 8) 6월 3일, 11살 이른 나이에 세자로 책봉됐던 25세의 양녕대군 이제(李제)가 결국 폐위되고, 그날로 태종은 셋째 아들 이도(李도)를 세자로 삼으니, 이가 곧 훗날 천추에 명성이 빛나는 성군 세종대왕이라, 그때 나이 22세였다. 8월에 들어 태종은 상왕으로 물러 앉고 사직을 세종에게 넘겨 , 그 달 8일 역사적인 즉위식을 가지니 세종은 세자에 오른지 두달 만에 왕이 된 셈이다.
일설에는 양녕대군이 아버지의 치세를 눈여겨 보고, 임금 노릇하기가 싫어, 의도적으로 난봉을 피워 폐세자의 길을 걸었다는 말이 있긴 하나, 어릴 때부터 공부는 재껴 버린 채 사냥과 주색으로 해를 넘기기 일쑤였던 그의 몸가짐으로 볼때 이해하기 어렵다.
양녕대군은 태종7년(1407) 14살 때 이조전서(吏曹典書-인사행정 최고 수장)를 역임한 대신 김한로(金漢老)의 딸을 아내로 맞았는데, 3년쯤 지내더니 권태를 느꼈는지 17살에 들자 다른 여자들을 찾기 시작했다. 거칠게 없는 세자는 넘봐서 침이 솟는 여자는 놓지질 않았다. 맨 처음 찍힌 외방 여자는 기생 봉지련이었다. 태종10년 늦가을, 명나라 사신 맞이 잔치 자리에서 간드러지게 춤추던 기생 봉지련을 눈여겨 본 양녕은, 그날 밤 결국 시종 둘을 거느리고 봉지련의 집을 덮친 뒤, 좀더 쉽게 자주 만나고자 대궐로 끌어 들이었다. 소문을 들은 태종은, 세자의 외입 나들이 안내를 맡았던 시종 둘을 죽지 않을 만큼 곤장을 치고, 죄없는 봉지련은 잡아다 옥에 가두게했다.
봉지련을 접하지 못해 안달이 난 양녕은, 그만 입맛을 잃고 말았다. 태종은 놀라 세자가 상사병이나 들어 혹 폐인이 되지 않을 까 싶어 봉지련을 풀어 주고 비단까지 하사하여 위로하였다. 태종은 세자로 하여금 봉지련을 만나기는 하되 궁중에 불러 들이는 것은 금했다.
세자는 이로부터 뻔질나게 궁궐을 드나들며 엽색행각을 벌이는데, 시자들이 임금의 눈치를 보느라 따르질 않았다. 결국 세자는 궐밖에서 무술에 능하고 사내들이 바람 피려 찾는 골목에 밝은 장정을 골라 채용, 이들을 앞세워 장안의 기생 집을 누비며 헤맸다. 그러니 세자가 힘써 나가야 할 서연(書筵)자리에는 빠지기 일쑤였다. 뿐만 아니라 세자의 거처인 동궁에 창기(娼妓)를 끌어 들여 음간을 일삼고, 서연관들이 강론 자리에 나오도록 기별하면 병을 핑계로 나가질 않았다. 심지어 자기 장인의 말에 창기를 태워 동궁으로 들어 오게한 기막힌 일도 있어, 주변을 어리둥절 하게했다.
이리하여 양녕은 장안의 웬만한 기생은 거진 섭렵하였는데, 그 가운데 상왕 정종이 거느렸던 기생 초궁장도 있었다. 그는 초궁장이 숙부 정종과 그런 사인 줄 모르고 통간했다가, 태종의 불같은 분노를 샀다.
초궁장 다음에 찍힌 여자는 기생 칠점생이었다. 그는 원래 양녕의 매형 이백강(李伯剛)이 끼고 놀던 첩실이었는데, 이백강의 집에서 한 번 보고는 홀딱 반해, 동궁으로 끌고 들어와 일을 내 버린 것이다.
양녕이 대신들의 지탄을 받은 결정적인 사건은, 중추원의 고위 인물 곽선(郭璇)의 첩 어리를 범한 일이었다. 절색으로 소문이 난 어리는 기생이 아닌 엄연한 대관의 첩실이었다. 여자 얼굴이 예쁘다는 소문만은 결코 흘려 듣지 않던 세자는, 물인가 불인가를 가리질 않고 덤볐다. 어리를 강제로 납치하여 욕심을 채운 뒤, 돌려 보내기 아까웠던지 동궁에 두고 함께 지내니, 세자의 이런 불장난은 심각한 사회문제로 확대되고, 결국 어리가 잉태하기에 이르자, 세자빈 김씨의 친정 할머니가 거들어 아이를 낳으니, 태종은 홧김에 세자빈을 친정으로 내쫓고, 사돈 김한로를 나주로 귀양 보내는 등, 엉뚱하게 분을 풀었다. 태종은 대신들의 간곡한 청으로 세자의 다짐을 받은 끝에, 폐세자의 길만은 피하려 했는데, 그런 두 달쯤 뒤에, 이번에는 방유신이라는 양가의 손녀딸을 강간하고 말았다. 마침내 포기해 버린 태종에게 세자는 한술 더 떠
“아버지는 여러 첩을 거느렸으면서 왜 세자에게는 첩을 거느리는 것을 허락하지 않느냐?”
는 항변조의 편지를 올리고 말았다. 결국 태종은 세상에 태어난 목적이 오직 여색을 즐기기 위한 것인 양 사는 세자에게, 나라를 넘겨 줄수가 없었다. 이런 양녕대군은 뒤에 세종의 극진한 보살핌을 받으며 한량으로 살다가, 세조8년(1462) 69세 일기로 눈을 감았다. 그는 적실에서 3남 4녀, 서자녀 7남 11녀를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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