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 뒷 이야기>20 강용(剛勇)한 명장 최영
(주)하동신문 0 2,027
정연가 <前. 하동문화원장>
손으로 칡넝쿨 휘어잡고 푸른 봉에 오르니
한 암자가 높이 흰구름 속에 누워있네
눈에 들어온 것 모두 우리 땅으로 한다면
초나라·월나라·강남인들 어찌 용납 못하리.
태조 이성계(李成桂)가 잠룡(潛龍)시절 꿈을 피력한 시였다. 또 어느날 중신들과 어울린 흥겨운 자리에서 이성계는 한 싯귀로 주위을 눌렀다.
“三尺劒頭安社稷 : 석자 칼머리에 사직이 편안하다”
풍기는 의미가 예사롭지 않았다. 좌중이 모두 대꾸할 싯귀를 찾지 못하는데, 오직 최영(崔瑩)이 받았다.
“一條鞭末定乾坤 : 한 가닥 채찍 끝이 천지를 평정하네”
사람들은 최영 장군의 호매(豪邁)한 도량에 탄복하였다.
최영의 본관은 동주(東州-철원), 득관조(得貫祖) 최준옹(崔俊邕)은 고려 태조 왕건(王建)의 후삼국통일에 공을 세워, 벽상공신으로 태광태사 직위에 올랐고, 그의 현손 최유청(崔惟淸)이 고려 명종때 집현전대학사로 판예부사에 이르렀다. 최유청의 증손 최원직(崔元直)이 곧 최영의 아버지로, 사헌규정(司憲糾正)이라는 공직기강을 다잡는 직위에있었는데, 그리 높은 벼슬은 아니었다.
지씨(智氏)를 어머니로 하여, 충숙왕3년(1316) 고양에서 태어난 최영은, 풍채가 괴걸하고 체력이 강건하였다. 그는 무예에 뛰어나 처음 양광도(楊廣道-경기도 양주·광주지역) 도순문사(都巡問使) 휘하에 들어가 왜구 토벌에 크게 전공을 세웠다. 그런 공을 인정 받아 그는 곧 우달치(于達赤)가되었는데, 우달치는 몽고의 군사 편제상의 관직으로, 왕을 경호하는 일이라, 요즘의 청와대 경호실 요원이 된 셈이었다.
이후 최영은 공민왕 등극 초기, 전횡을 일삼던 좌정승 ‘조일신(趙日新)의 난’ 평정에 힘을 보태 호군(護軍)에 오르고, 이어 39세 나이로 대호군에 올라 군부의 중추 인물이 되었다. 이때 내부에 반란이 심해 몸살을 앓던 원나라가, 고려에 원병을 청하자 최영이 군사 2000명을 거느리고 중국에 들어가 용맹을 떨치고 개선하였다.
이듬해, 공민왕5년(1356) 배원정책을 쓰기 시작한 공민왕은, 최영을 서북면병마부사로 항원(抗元)의 선봉에 세우니, 그는 서북면병마사 인당(印당)과 함께, 원나라에 속했던 압록강 근처의 땅을 수복했다.
이후 몰락한 원나라 세력 공백기에 발호한 홍건적(紅巾敵)이, 기습 공격으로 평양을 점령하자, 최영은 이들을 무찔러 평양윤(平壤尹-평양시장) 겸 서북면순문사가 되고, 공민왕10년(1361) 다시 홍건적 10만명이 대거 쳐 들어와 수도 개경을 함락하니, 이듬해 이들을 격퇴, 개경을 수복하여 나라를 안정시켰다.
최영은 공민왕에 이어 우왕에 이르기까지, 홍건적 뿐만 아니라 서남 해안 지방에 자주 출몰하는 왜구까지 격퇴하느라, 한 시름도 편할 날이 없던 나라의 버팀목이며, 원나라에서도 알아주는 명장이었다.
우왕14년(1388) 1월 15일, 최영은 국정 최고의 직위인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올랐는데, 2월 명나라가 철령(鐵嶺-함경남도 안변과 강원도 회양의 경계를 이루는 고개) 이북과 이서, 이동은 본래 원나라 땅이므로, 철령위(鐵嶺衛)를 설치하여 요동(遼東)에 편입 시킨다는 계획을 통보해 오니 최영은, 명나라에 그 따위 계획을 철회 할것을 요구하고, 요동 정벌을 주장, 군사를 발진시켰다. 결국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으로 요동정벌이라는 원대한 꿈을 잃은 최영은, 이성계 일파 군사들에게 붙잡혀 고향인 경기도 고양에 귀양을 갔다가 마산, 충주 등지로 옮겨졌는데, 결국 공요죄(攻遼罪-요동을 공격했다는 죄)라는 희한한 죄목으로 개경에 끌려와 참수되고 말았다. 안타까운 생애 73년.
최영이 당했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개성 사람들은, 모두 저자의 문을 걸고 슬피 울었고, 지방의 백성들도 최영이 ‘…그리하여 세상을 떴다’는 말을 늦게야 전해 듣고는 한결같이 눈시울을 붉히고 탄식하였다. 새 왕조를 창업한 이성계는 결코 무심 할 수없어, 개국 6년만에 최영에게, 무민공(武愍公)으로 시호를 내려 그의 넋을 달랬다. 오늘날의 경기도 고양 벽제에 최영의 붉은 황토 무덤이 있다.
태조 이성계의 역성혁명 정당화에 가려진 최영의 인물됨을, 조선역사 기록의 틀에서 벗어나, 제대로 짚어 봐야 되지 않을까 싶다.
(주)하동신문 0 2,027
정연가 <前. 하동문화원장>
손으로 칡넝쿨 휘어잡고 푸른 봉에 오르니
한 암자가 높이 흰구름 속에 누워있네
눈에 들어온 것 모두 우리 땅으로 한다면
초나라·월나라·강남인들 어찌 용납 못하리.
태조 이성계(李成桂)가 잠룡(潛龍)시절 꿈을 피력한 시였다. 또 어느날 중신들과 어울린 흥겨운 자리에서 이성계는 한 싯귀로 주위을 눌렀다.
“三尺劒頭安社稷 : 석자 칼머리에 사직이 편안하다”
풍기는 의미가 예사롭지 않았다. 좌중이 모두 대꾸할 싯귀를 찾지 못하는데, 오직 최영(崔瑩)이 받았다.
“一條鞭末定乾坤 : 한 가닥 채찍 끝이 천지를 평정하네”
사람들은 최영 장군의 호매(豪邁)한 도량에 탄복하였다.
최영의 본관은 동주(東州-철원), 득관조(得貫祖) 최준옹(崔俊邕)은 고려 태조 왕건(王建)의 후삼국통일에 공을 세워, 벽상공신으로 태광태사 직위에 올랐고, 그의 현손 최유청(崔惟淸)이 고려 명종때 집현전대학사로 판예부사에 이르렀다. 최유청의 증손 최원직(崔元直)이 곧 최영의 아버지로, 사헌규정(司憲糾正)이라는 공직기강을 다잡는 직위에있었는데, 그리 높은 벼슬은 아니었다.
지씨(智氏)를 어머니로 하여, 충숙왕3년(1316) 고양에서 태어난 최영은, 풍채가 괴걸하고 체력이 강건하였다. 그는 무예에 뛰어나 처음 양광도(楊廣道-경기도 양주·광주지역) 도순문사(都巡問使) 휘하에 들어가 왜구 토벌에 크게 전공을 세웠다. 그런 공을 인정 받아 그는 곧 우달치(于達赤)가되었는데, 우달치는 몽고의 군사 편제상의 관직으로, 왕을 경호하는 일이라, 요즘의 청와대 경호실 요원이 된 셈이었다.
이후 최영은 공민왕 등극 초기, 전횡을 일삼던 좌정승 ‘조일신(趙日新)의 난’ 평정에 힘을 보태 호군(護軍)에 오르고, 이어 39세 나이로 대호군에 올라 군부의 중추 인물이 되었다. 이때 내부에 반란이 심해 몸살을 앓던 원나라가, 고려에 원병을 청하자 최영이 군사 2000명을 거느리고 중국에 들어가 용맹을 떨치고 개선하였다.
이듬해, 공민왕5년(1356) 배원정책을 쓰기 시작한 공민왕은, 최영을 서북면병마부사로 항원(抗元)의 선봉에 세우니, 그는 서북면병마사 인당(印당)과 함께, 원나라에 속했던 압록강 근처의 땅을 수복했다.
이후 몰락한 원나라 세력 공백기에 발호한 홍건적(紅巾敵)이, 기습 공격으로 평양을 점령하자, 최영은 이들을 무찔러 평양윤(平壤尹-평양시장) 겸 서북면순문사가 되고, 공민왕10년(1361) 다시 홍건적 10만명이 대거 쳐 들어와 수도 개경을 함락하니, 이듬해 이들을 격퇴, 개경을 수복하여 나라를 안정시켰다.
최영은 공민왕에 이어 우왕에 이르기까지, 홍건적 뿐만 아니라 서남 해안 지방에 자주 출몰하는 왜구까지 격퇴하느라, 한 시름도 편할 날이 없던 나라의 버팀목이며, 원나라에서도 알아주는 명장이었다.
우왕14년(1388) 1월 15일, 최영은 국정 최고의 직위인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올랐는데, 2월 명나라가 철령(鐵嶺-함경남도 안변과 강원도 회양의 경계를 이루는 고개) 이북과 이서, 이동은 본래 원나라 땅이므로, 철령위(鐵嶺衛)를 설치하여 요동(遼東)에 편입 시킨다는 계획을 통보해 오니 최영은, 명나라에 그 따위 계획을 철회 할것을 요구하고, 요동 정벌을 주장, 군사를 발진시켰다. 결국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으로 요동정벌이라는 원대한 꿈을 잃은 최영은, 이성계 일파 군사들에게 붙잡혀 고향인 경기도 고양에 귀양을 갔다가 마산, 충주 등지로 옮겨졌는데, 결국 공요죄(攻遼罪-요동을 공격했다는 죄)라는 희한한 죄목으로 개경에 끌려와 참수되고 말았다. 안타까운 생애 73년.
최영이 당했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개성 사람들은, 모두 저자의 문을 걸고 슬피 울었고, 지방의 백성들도 최영이 ‘…그리하여 세상을 떴다’는 말을 늦게야 전해 듣고는 한결같이 눈시울을 붉히고 탄식하였다. 새 왕조를 창업한 이성계는 결코 무심 할 수없어, 개국 6년만에 최영에게, 무민공(武愍公)으로 시호를 내려 그의 넋을 달랬다. 오늘날의 경기도 고양 벽제에 최영의 붉은 황토 무덤이 있다.
태조 이성계의 역성혁명 정당화에 가려진 최영의 인물됨을, 조선역사 기록의 틀에서 벗어나, 제대로 짚어 봐야 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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