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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왕조 뒷 이야기

<조선왕조 뒷 이야기> 40 빼앗은 왕의 꿈

by 까망잉크 2018. 6. 28.


<조선왕조 뒷 이야기> 40 빼앗은 왕의 꿈

 

(주)하동신문 


수양대군이 조카의 옥좌를 빼앗아 앉은 이듬해인 1456년 6월 2일, 성삼문(成三問) 등의 상왕(단종) 복위 꿈은, 함께 무릎을 맞대고 계책을 짰던 김질(金질)의 배신으로 들통 나고 말았다. 
상왕을 향한 충신들은 굴비두름 엮기듯 줄줄이 묶여 모진 단근질을 당한 뒤, 그달 7일 무더기로 형장에서 목이 잘리거나 사지가 발겨져 죽었다. 반역 죄인은 씨를 말리는게 법도라, 명색이 사내라면 젖먹이까지 세상과 인연을 끊어야했다. 까닭을 모른채 끌려나와 땡볕이 싫다며 철없이 울부짓다가, 형리들이 시끄럽다며 입에 퍼 넣은 흙을 가득 머금은 채 죽어간 어린것도 있었다. 
이날 떼지어 북망산을 채운 저승 식구는, 권자신(權自愼-단종의 외숙부), 성삼문을 비롯한 그의 아버지 성승(成勝), 성삼빙(三聘)·삼고(三顧)·삼성(三省) 등 성삼문 형제와, 아들들인 성맹첨(成孟瞻)·맹년(孟年)·맹종(孟終)과 아직 이름을 짓지 않은 갓난애, 하위지(河緯地)와 그의 아들 하호(河琥)·하박(河珀), 스스로 목을 찔러 미리 떠난 유성원(柳誠源), 이개(李塏)와 그의 매부 허조(許조), 김문기(金文起), 유응부(兪應孚), 고문에 못이겨 옥중에서 간밤에 눈을 감은 박팽년(朴彭年)과 그의 아버지 박중림(朴仲林), 아우 박대년(朴大年), 그리고 아들 박헌(朴憲)·순(珣)·분(奮) 등등, 다섯 손가락을 몇 번이나 꼽았다 펴기를 거듭해서 헤아려야 할만큼 그 숫자가 많았다. 한바탕 피바람이 불더니 화살이 뒷방에서 숨죽여 지내는 상왕에게 겨눠졌다. 
한명회(韓明澮) 등 세조의 측근들이 상왕이 없어야만 세상이 조용할 것이라며 세조를 졸랐다. 마침내 양녕·효령대군까지 상왕이 화근이라며 세조의 결단을 부추겼다. 이 무슨 해괴 망측한 수작(酬酌)인가? 빼앗은 일이 화근이지 어찌 뺏긴 상왕이 화근인가? 마침내 세조의 마음도 기울어 이듬해 6월,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등시켜 강원도 영월 산골에 쳐박아 버린 상왕이, 기어이 뱉아 버랴야할 홍시속의 씨앗처럼 여겨졌다.
1457년 9월 초이튿날 새벽, 세조는 묘한 꿈을 꾸었다. 느닷없이 노산군의 생모 권씨가 나타나 엄청난 말을했다. 
“네가 죄없는 내 자식을 죽이려하니, 나 또한 네 자식을 죽이겠다!”. 
세조가 화들짝 놀라 깼는데, 곧 그의 맏아들로 잃어서는 안 될 왕세자 이장(李暲)의 죽음을 알리는 곡성이 대궐을 울렸다. 
이장은 갓 20세에 접어든 착하긴 했지만 늘 골골거리던 병약한 젊은이.  
세자가 저승 문턱을 넘어버렸다는 전갈에 세조는, 그 원인을 오직 노산군 어머니 권씨 탓으로 돌려 격분했다. 분풀이로 곧 권씨가 잠들어있는 경기도 안산의 소능을 지체 없이 파헤쳐 뭉개 버리도록 명을 내렸다. 능 주변 소나무들을 모조리 뽑아 버리고, 석물은 모두 파서 다른 곳으로 옮겨 달리 쓰이게했다. 왕비의 유골은 냇가로 옮겨 묻어 냇물이 불으면 잠기고 쓸려가도록 만들어 버렸다. 
그런 뒤 10월 24일 노산군을 죽여 시신을 동강물에 던져 띄워버리는 것으로 분을 풀었다. 죄는 흘러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맴돌며 쌓이는 것이다. 숨통을 끊어 버린 조카의 무덤이라도 만들어 줄 일이지 해도해도 너무 했다.
문종 즉위와 함께 현덕왕후로 추봉됐던 문종비 권씨는, 단종을 낳은 이틀만인 세종23년(1441) 7월 24일 24세 젊은 나이 때 산통(産痛)으로 그만 세상을 떴으니, 16년전 세조가 수양대군 시절에 있었던 까마득한 옛일이었다. 
꿈이란 무엇인가? 잠속에서 생시처럼 느끼지는 실없는 환각이 아닌가. 그러니 꿈은 꾸는자의 정신 탓이지 어찌 무덤속의 해골탓인가. 조카를 죽이려는 세조의 죄의식 속에 형수의 모습이 잠재했던게 아니었을까.
세조의 화풀이는 잔인하게 계속 되었다. 그는 단종의 외갓집을 멸문(滅門) 시켜 족보를 비게 만들어버렸다. 이미 죽은 단종의 외할아버지 권전(權專)의 모든 관작을 추탈, 서인으로 삼았다. 지난해 성삼문 등과 죽음을 함께한 권 씨의 아우 권자신은 단종때 호조참판(재정부처 차관)에 올랐는데, 단종이 왕위를 빼앗기는 일을 당하니, 밥맛을 잃어 남 몰래 이를 갈았다. 
그러나 세조즉위 공신책록 때 쉰떡 돌리듯 주는 좌익공신 3등을 받는데, 구역질이 나는 더러운 일이었으나 참고 견뎠다가 상왕 복위 모의에 가담, 사지가 찢기는 거열형을 받아 죽었던 것이다.
어느 작가는 세조를 두고 『피에 저린 몸으로 자리를 빼앗아 고름에 젖은 몸으로 자리를 내 놓기까지 악취13년이었다.』고 썼다. 
세조의 소능 훼손행위는 지워지지 않는 역사의 웃음거리로 전하는데, 권씨의 무덤은 중종8년(1513) 경기도 구리에 현릉(顯陵)으로 복원되었다.                                   
정연가(한국수필문학가 협회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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