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 뒷 이야기> 38 세종의 아들 딸들
대왕 세종은 조선조 제왕들 가운데 아들을 가장 많이 둔 왕이었다. 정비(正妃)에서 8남 2녀, 다섯 후궁에서 10남 2녀를 두었으니, 전체 18남 4녀였다. 통털어 따진다면 세종의 아버지 태종이 정비에서 4남 4녀, 아홉 후궁에게서 8남 13녀를 얻어, 모두 12남 17녀였으니, 세종보다 자녀수는 많았으나, 왕자는 단연 세종이 많이 거느렸다. 따라서 세종의 정비 소헌왕후 심씨는 대군 여덟, 공주 둘을 낳아, 조선조 역대 가장 많은 자녀를 생산한 왕비로 손꼽힌다.
세종의 적장자 향(珦)은 곧 조선 5대왕 문종, 그는 재위 2년 3개월만에 39세 나이로 세상을 떴다.
적차남 유(유)는 곧 수양대군, 뒤에 조카 단종을 밀쳐 내고 왕이 되니 곧 세조였다. 그는 39세때 시끌벅적하게 왕이 되어 재위 13년 3개월만에 피부 근지럼 병으로 52세때 죽으니, 사가들은 문둥병으로 죽었다고 쓰기도했다. 세종의 적3남 용(瑢)은 당대 제일의 서예가로 이름을 떨친 안평대군, 그는 형 수양대군에 맞섰다가 패해 강화도에서 사사(賜死)당했다. 나이 36세. 적4남 임영대군 구(구), 그는 한때 세종의 총애를 받았으나 여자를 너무 밝혀, 점찍은 아녀자를 사내로 변장시켜 궁궐안으로 데리고 들어오다가 문지기에게 들켜 수모를 당한 일도있다. 수양대군 편을 들어 영화를 누리다가 51세로 죽었다. 세종의 적5남 광평대군 여(璵), 그는 성품이 너그럽고 총명했다. 태조의 일곱째 아들 방번의 봉사손이 되어 후사를 이었는데, 아깝게도 아들 하나를 두고 20세로 요절하였다. 여섯째 적왕자 금성대군 유(瑜), 성품이 강직하고 충효심이 지극하여, 조카 단종을 끝까지 지키려다 역모죄를 쓰고 처형 당하고 말았다. 나이 32세. 일곱째 평원대군 임(琳), 그는 일찍부터 학문을 즐겨 시를 잘 짓고 글씨에 능했다. 11세때 남양 홍씨와 결혼하였는데, 나이 19세 되던 해 그만 천연두에 걸려 슬하도 없이 죽었다. 성격이 세종을 닮아 온화하고 효성과 우애가 깊었다. 그의 죽음에 충격을 받아 당뇨병이 악화된 세종은, 마음을 다잡고자 불교에 의지하게 되었다. 막내 영응대군 염(琰), 세종 내외가 막내로 총애하니, 세종이 그의 저택에서 눈을 감았다. 서화에 능하고 음율에 뛰어났으나 슬하에 딸 하나만 두고 34세 나이로 죽었다.
세종의 첫 딸 정소공주는 일찍 죽어 기록이 드물다, 둘째 정의공주는 안맹담(安孟聃)과 혼인했는데, 안맹담은 술을 지나치게 좋아하여 세종이 불러 호통을 치기도했다. 글씨와 음율에 밝았던 그가 48세로 죽자, 그를 아끼던 세조는 이틀간 조회를 폐하고 부조를 넉넉하게 내렸다.
세종의 후궁 소생 왕자들 가운데도 파란을 겪은 인물들이 많았다.
세종의 서장자 화의군 영(瓔), 세조를 반대하다가 유배당해 죽었다. 서2남 계양군 증(증), 세조편을 들어 좌익공신이 되었다. 서3남 의창군 공(공), 수양대군의 반정에 적극 가담, 수양이 왕위에 올라 총애하였으나 술병으로 일찍 죽었다.
서4남 한남군 어(어), 어머니 혜빈 양씨가 단종을 감싸다가 죽임을 당할 때 연좌되어 함양에 유배되어 죽었다. 서5남 밀성군 침(琛), 세조의 등극에 힘을 보태 익대 좌리공신이 되어 호사를 누렸다. 서6남 수춘군 현(玹), 한남군 어와 동복형제, 안평대군과 친했고 어머니 혜빈 양씨와 단종을 지키려다 유배당해 죽었다.
서7남 익현군 관(관), 세조를 도와 좌익공신1등에 책록되어 세조의 아낌을 받았다. 그러나 주색을 밝혀 창기를 자주 집안으로 불러들여 몸을 탕진하다가 33세로 죽었다. 서8남 영풍군 전(전), 혜빈 양씨 소생으로 어머니와 두형들과 함께 단종을 챙기다가 세조의 미움을 받아 유배당해 죽었다. 부인이 사육신의 한사람인 박팽년의 딸. 서9남 영해군 당(당), 성격이 화목함을 좋아해 다투는 일이 없었다. 43세 일기로 죽었다. 서10남 담양군 거(거) 신빈 김씨 소생인데 12세 어린 나이로 요절했다.
세종의 서장녀 정현옹주는 윤사로(尹師路)의 아내가 되었다. 윤사로는 본래 부잣집 태생으로 재물 쌓기를 즐겨, 윤사윤, 정인지, 박종우와 함께 당대 4대부호에 들었다. 그는 너그럽고 선비를 대접 할 줄알아 따르는 사람이 많았으나 인색, 탐익(貪益)하다가 41세로 죽었다.
세종의 서차녀 정안옹주의 남편은 심안의(沈安義)였다. 그의 아버지는 관찰사 심선(沈璿). 세조의 집권을 도와 벼슬이 오위도총부 도총관에 이르렀다. 성격이 부드럽고 용모가 장대하여 장수의 풍모가 있었으나 39세로 죽었다.
결국 세종이 낳은 왕자들도 세조의 순리에 어긋난 왕통 욕심 때문에 평온하질 못한 경우가 많았던 셈이다.
정연가(한국수필문학가 협회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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