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 뒷 이야기> 51 후손이니 죽이지 말라!
(주)하동신문
포은 정몽주(鄭夢周)는 아들 둘을 두었는데, 장남 종성(宗誠)은 이조참의였고, 차남 종본(宗本)은 성균관 사예(司藝-국립대 교수)였다. 포은을 만고의 충신으로 현창한 태종·세종의 보살핌이 있어, 그들은 세상에 나와 관직 생활을 할 수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정종성은 정종(定宗)의 넷째 아들 선성군(宣城君) 이무생(李茂生)을 사위로 삼았으니, 조선 왕조의 제왕과 사돈을 맺기도했다.
정종성은 아들 정보(鄭保)를 두었는데, 곧 포은의 손자라 학문이 뛰어나 세종의 총애를 받았다. 벼슬을 받아 예안(禮安)현감·사헌부감찰등을 역임했다. 호를 설곡(雪谷)이라했던 정보는, 일찍이 성삼문(成三問), 박팽년(朴彭年) 등과 어울려 학문을 논하며 깊이 교유(交遊)하였다.
그는 성품이 곧아 범사(凡事)에 구속 됨이 없었고 의로운 일에는 목숨을 기꺼이 거는 올 곧은 선비로, 늘 왕위를 앗긴 단종을 측은히 여겼다.
정보의 아버지 정종성의 측실에서 난 딸이 세조의 일급 책사 한명회(韓明澮)의 첩실이라, 정보는 한명회와 서남매(庶男妹) 사이였다. 그러나 세상을 보는 눈길이 서로 달라 단종을 사모하는 정보와 한명회는 사이가 엇갈렸다.
한명회는 정보의 서누이를 첩으로 삼으면서 정보에게 노비 30명을 주면서까지 정보와 가까이 지내려 마음을 썼는데, 정보는 세조에게 빌붙어 출세에 눈이 먼 한명회를 혐오한 나머지, 점점 거리를 두고 멀리했던 것이다.
한명회는 속으로
‘정보가 적게 준다고 언짢아 한다’
고 넘겨 짚어, 정보를 감정적으로 미워하던 참이었다.
세조2년(1456) 6월, 이른바 사육신들의 단종 복위 모의사건이 터져, 성삼문 등이 죽음을 면치 못하게 됐다.
정보는 아까운 젊은 인재들이 목숨을 잃게 되었다는 절망감에 젖어, 안절 부절 밤잠을 설치다가, 어떻게 해서든 성삼문과 박팽년의 목숨만은 살려야겠다는 각오를 다진 끝에, 뜬 눈으로 밤을 새우고 날이 밝자 대면 조차 하기 싫은 한명회 집을 찾았는데 한명회가 보이질 않았다.
“자준(子濬-한명회 자)은 어디 갔는가?”
정보의 다급한 질문에 서 누이가 대답했다.
“죄인들을 국문하느라 대궐에 있습니다!”
이에 정보가 주먹을 휘두르며 입에 거품을 물고 말하기를
“그들이 무슨 죄인인가? 자준이 만일 이 사람들을 죽이면 만고의 죄인이 될것이다!”
하고, 자리를 박차고 나와 버렸다. 대궐에서 돌아와 첩실로부터 정보의 행보를 자초 지종 전해 들은 한명회는, 곧장 세조에게 달려가 일러 바쳤다.
“정보가 난언(亂言)을 하였습니다!”
하고 정보가 성삼문·박팽년을 비호하였음을 고한 것이었다.
세조가 분기탱천하여 즉시 정보를 잡아드려 친히 국문하니, 정보는
“항상 성(成)·박(朴)을 성인군자로 여겼기 때문에 그런 말을 했오!”
라며, 이미 삶을 포기한 듯 부인하거나 겁내는 기색이 전혀 없었다.
옆에서 지켜보던 세조의 측근들이
“죄인이 자백하였으니 처형하기를 청합니다” 하며, 더 물을 것없이 정보를 죽이라했다. 화가 치민 세조가 팔다리 사지(四肢)에 수레를 매달아 찢어 죽이는 환형에 처하도록 명하고, 끌려 나가는 정보의 뒷모습을 보고
“저자가 대관절 어떤 놈이냐?”
하고 측근에 물으니, 누군가 옆에서 대답하였다.
“그는 정몽주의 손잡니다”
하였다. 그러자 세조는 놀란 표정으로 급히 행형(行刑)을 중지하도록 명하고 말했다.
“충신의 후손이니 형을 감하여 연고가 있는 경상도 연일(延日)로 귀양을 보내라!”
정보는 세 아들이 있었다. 맏이 윤정(允貞)은 주부(注簿) 벼슬을 하고 있었고, 다음은 윤화(允和), 막내는 윤관(允寬)이었다.
차남 정윤화가 총명하여 장가 들기전에 문과에 급제하였는데, 급제자를 모아 이름을 부르는 자리였던 좌판(坐板)을 잘못 디뎌 떨어져 그만 목숨을 잃고 말았다.
정보는 너무 아까워 애통한 끝에 그만 속병을 얻었다. 성삼문 등을 살려 보려다가 세조에게 붙들려가게 되자 정보는 말했다.
“우리 아이가 다행히 먼저 죽었다.
그때 안 죽었더라면 반드시 오늘에 와서 나와 함께 죽어야 할 것 아닌가?”
정보가 귀양을 살고 있는 경상도 연일 근처 순흥(順興)에 역시 세조의 아우로 단종 복위를 모의했던 금성대군이 유배 살이를 하고 있었다. 얼마후 “정보와 금성대군을 가까이 두면 안된다”는 세조의 판단으로 정보는 다시 지리산 기슭 단성(丹城)으로 옮겨져 거기서 세상을 마치니, 사람들은 그를 장릉(莊陵-단종의 능)충신이라했다.
정연가(한국수필문학가협회 이사)
(주)하동신문
포은 정몽주(鄭夢周)는 아들 둘을 두었는데, 장남 종성(宗誠)은 이조참의였고, 차남 종본(宗本)은 성균관 사예(司藝-국립대 교수)였다. 포은을 만고의 충신으로 현창한 태종·세종의 보살핌이 있어, 그들은 세상에 나와 관직 생활을 할 수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정종성은 정종(定宗)의 넷째 아들 선성군(宣城君) 이무생(李茂生)을 사위로 삼았으니, 조선 왕조의 제왕과 사돈을 맺기도했다.
정종성은 아들 정보(鄭保)를 두었는데, 곧 포은의 손자라 학문이 뛰어나 세종의 총애를 받았다. 벼슬을 받아 예안(禮安)현감·사헌부감찰등을 역임했다. 호를 설곡(雪谷)이라했던 정보는, 일찍이 성삼문(成三問), 박팽년(朴彭年) 등과 어울려 학문을 논하며 깊이 교유(交遊)하였다.
그는 성품이 곧아 범사(凡事)에 구속 됨이 없었고 의로운 일에는 목숨을 기꺼이 거는 올 곧은 선비로, 늘 왕위를 앗긴 단종을 측은히 여겼다.
정보의 아버지 정종성의 측실에서 난 딸이 세조의 일급 책사 한명회(韓明澮)의 첩실이라, 정보는 한명회와 서남매(庶男妹) 사이였다. 그러나 세상을 보는 눈길이 서로 달라 단종을 사모하는 정보와 한명회는 사이가 엇갈렸다.
한명회는 정보의 서누이를 첩으로 삼으면서 정보에게 노비 30명을 주면서까지 정보와 가까이 지내려 마음을 썼는데, 정보는 세조에게 빌붙어 출세에 눈이 먼 한명회를 혐오한 나머지, 점점 거리를 두고 멀리했던 것이다.
한명회는 속으로
‘정보가 적게 준다고 언짢아 한다’
고 넘겨 짚어, 정보를 감정적으로 미워하던 참이었다.
세조2년(1456) 6월, 이른바 사육신들의 단종 복위 모의사건이 터져, 성삼문 등이 죽음을 면치 못하게 됐다.
정보는 아까운 젊은 인재들이 목숨을 잃게 되었다는 절망감에 젖어, 안절 부절 밤잠을 설치다가, 어떻게 해서든 성삼문과 박팽년의 목숨만은 살려야겠다는 각오를 다진 끝에, 뜬 눈으로 밤을 새우고 날이 밝자 대면 조차 하기 싫은 한명회 집을 찾았는데 한명회가 보이질 않았다.
“자준(子濬-한명회 자)은 어디 갔는가?”
정보의 다급한 질문에 서 누이가 대답했다.
“죄인들을 국문하느라 대궐에 있습니다!”
이에 정보가 주먹을 휘두르며 입에 거품을 물고 말하기를
“그들이 무슨 죄인인가? 자준이 만일 이 사람들을 죽이면 만고의 죄인이 될것이다!”
하고, 자리를 박차고 나와 버렸다. 대궐에서 돌아와 첩실로부터 정보의 행보를 자초 지종 전해 들은 한명회는, 곧장 세조에게 달려가 일러 바쳤다.
“정보가 난언(亂言)을 하였습니다!”
하고 정보가 성삼문·박팽년을 비호하였음을 고한 것이었다.
세조가 분기탱천하여 즉시 정보를 잡아드려 친히 국문하니, 정보는
“항상 성(成)·박(朴)을 성인군자로 여겼기 때문에 그런 말을 했오!”
라며, 이미 삶을 포기한 듯 부인하거나 겁내는 기색이 전혀 없었다.
옆에서 지켜보던 세조의 측근들이
“죄인이 자백하였으니 처형하기를 청합니다” 하며, 더 물을 것없이 정보를 죽이라했다. 화가 치민 세조가 팔다리 사지(四肢)에 수레를 매달아 찢어 죽이는 환형에 처하도록 명하고, 끌려 나가는 정보의 뒷모습을 보고
“저자가 대관절 어떤 놈이냐?”
하고 측근에 물으니, 누군가 옆에서 대답하였다.
“그는 정몽주의 손잡니다”
하였다. 그러자 세조는 놀란 표정으로 급히 행형(行刑)을 중지하도록 명하고 말했다.
“충신의 후손이니 형을 감하여 연고가 있는 경상도 연일(延日)로 귀양을 보내라!”
정보는 세 아들이 있었다. 맏이 윤정(允貞)은 주부(注簿) 벼슬을 하고 있었고, 다음은 윤화(允和), 막내는 윤관(允寬)이었다.
차남 정윤화가 총명하여 장가 들기전에 문과에 급제하였는데, 급제자를 모아 이름을 부르는 자리였던 좌판(坐板)을 잘못 디뎌 떨어져 그만 목숨을 잃고 말았다.
정보는 너무 아까워 애통한 끝에 그만 속병을 얻었다. 성삼문 등을 살려 보려다가 세조에게 붙들려가게 되자 정보는 말했다.
“우리 아이가 다행히 먼저 죽었다.
그때 안 죽었더라면 반드시 오늘에 와서 나와 함께 죽어야 할 것 아닌가?”
정보가 귀양을 살고 있는 경상도 연일 근처 순흥(順興)에 역시 세조의 아우로 단종 복위를 모의했던 금성대군이 유배 살이를 하고 있었다. 얼마후 “정보와 금성대군을 가까이 두면 안된다”는 세조의 판단으로 정보는 다시 지리산 기슭 단성(丹城)으로 옮겨져 거기서 세상을 마치니, 사람들은 그를 장릉(莊陵-단종의 능)충신이라했다.
정연가(한국수필문학가협회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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