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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왕조 뒷 이야기

<조선왕조 뒷 이야기> 52 삼중신(三重臣)도있다

by 까망잉크 2018. 7. 27.


<조선왕조 뒷 이야기> 52 삼중신(三重臣)도있다

 (주)하동신문   

1977년 7월, 대한민국국사편찬위원회는 사육신(死六臣)에 의문점이 있다며, 특별위원회를 구성, 활동에 들어갔는데 목적은, ‘왜 김문기(金文起)가 빠져, 사육신처럼 대접 받지 못하는가?’를 따지는 일이었다. 오랫 동안 논의 끝에 나온 결론은, 『김문기를 사육신의 한사람으로 현창(顯彰)하는 것이 마땅하다』였다. 위원회 만장일치로 채택한 결의에 따라, 노량진동 사육신묘역에 김문기의 가묘를 지었다. 이 일을 두고 학자들간에 논란이 벌어져 한동안 시끄러웠다. 나는 내가 ‘건방진 생각’이라 여기면서도 이렇게 중얼거린 기억이있다. 
『<육신전(六臣傳)>을 읽어 보지도 않은 사람들처럼, 권력에 눌려 쓰잘데 없는 논쟁을 벌인다.』 
‘사육신’은 남효온(南孝溫)이 쓴 <육신전>이란 이야기책이, 한참 세월이 흐른 뒤인 선조 때, 왕의 눈에 띄어 세간에 알려졌는데, 남효온은 ‘사육신’이란 말을 쓰질 않았다. 그때의 실록은 이렇다.
『왕은 “내가 <육신전>이란 것을 보고 놀랐다. 나는 참으로 이런 것인 줄 몰랐다. 후세를 그릇되게 할 책이라 모골이 송연하다. …남효온이란 자는 대체 어떤 놈이냐. 감히 문필을 휘둘러 국사를 폭로한단 말이냐. …이놈이 지금 있다면 당장 국문하여 다스릴 것이다!”했다.』
성삼문(成三問) 등이 화를 당할 때, 남효온은 나이 불과 세살이었다. 그는 철이 들었을때 누군가가 들려 주는 충신들의 특이한 일화나 면모를 뛰어난 필력으로 이야기책을 썼는데, 책에 오른 인물이 여섯 신하였기에 <육신전>이었다. 
남효온의 생각이 <육신전> 말미에 붙인 후기에 잘 나타나 있다.『누가 신하가 못되리요마는 지극하도다! 누가 죽지 않으리요마는 크도다! 여섯 분의 죽음이여!』
같은 무관으로써 희생된 성삼문의 아버지 성승(成勝)은 빠지고, 유응부(兪應孚)가 육신에 든 것은, 죽음을 눈 앞에 둔 유응부의 태도가 특이했기 때문이다. 그는 추국장에서 성삼문 등을 돌아 보고 “사람들이 서생(書生)과는 일을 꾀하지 말라더니 과연 그렇구나”라며, 거사를 미루자고한 문신들을 원망했고, 달군 쇠로 단근질 할 때 “쇠가 식었으니 다시 달궈오라!” 고 형리들을 호통을 쳤다. 
박팽년(朴彭年)은 세조가 등극하자 경회루 연못에 투신 자살하려했는데, 성삼문이 “살아서 후일을 도모하자”고 말려 마음을 바꿨고, 성삼문은 단종이 세조에게 선위(禪位)할 때 옥쇄를 끌어 안고 통곡했다. 
이개(李塏)는 수레에 실려 형장으로 갈 때 이런 시를 남겼다.

우정(禹鼎)처럼 중(重)할 때는 사는 것도 소중하더니
홍모(鴻毛)처럼 가벼워지니 죽는 것도 영광이네
새벽녘까지 잠못 이루다가 중문 밖을 나서니
현릉(顯陵)의 소나무가 꿈속에 푸르고나!

‘우정’은 하(河)나라 우왕(禹王)이 매우 귀중하게 여긴 아홉 발 달린 솥을 말했고, ‘홍모’는 기러기 털처럼 아주 가벼운 존재, ‘현릉’은 문종의 능을 말했다. 
하위지(河緯地)는 예조참판으로 승진시킨 세조가 주는 녹봉은 먹을 수 없다며 차곡 차곡 별도로 쌓아두었었다. 
유성원(柳誠源)은 성균관에서 성삼문 등이 잡혀갔다는 유생들의 말을 듣고, 관대를 쓴 관복차림으로 패도(佩刀)를 뽑아 자신의 목을 찔러 자결했다. 
남효온은 이들 죽음이 다른 충신들 죽음과는 달라 능히 이야깃감이 된다고 여겨 남다른 문장력으로 <육신전>을 썼던 것이다.   
백촌(白村) 김문기의 본관은 김녕(金寧), 충청도 옥천 백지리에서 살았는데, 효성이 지극하여 그가 살던 마을을 효자동이라했다. 어려서부터 명성이 높아 모두들 그의 장래를 촉망했다. 단종때 형조참판이었고, 세조가 공조판서를 제수했다. 사육신이 처형 될 때 그도 단종복위모의에 성삼문 등과 함께 했다가 처형되었다.
육신 참화 230여년 뒤인 숙종17년(1691), 숙종은 육신을 비로소 복관시켜 충신으로 기리게했고, 40년 뒤인 영조7년(1731) 영조가 김문기도 복관시켜 충의공(忠毅公)으로 시호까지 내렸다. 
그런 뒤 정조15년(1791) 정조는 국가 기본 의전록(儀典錄)인 <어정배식록(御定配食錄)>을 편찬할 때, 단종을 위해 충성을 바친 판서급 중신, 즉 계유정란때 희생된 이조판서 민신(閔伸), 병조판서 조극관(趙克寬)과 함께 공조판서 김문기도 꼽아 『삼중신(三重臣)』으로 책록, ‘사육신’ 못지않게 받들도록 했다.  
‘삼중신’의 죽음에 극적인 일화가 없어서인지 이야기책으로 전하질 않아 사람들이 널리 모르고 있어 아쉽지만, 사육신에 들지 않았다고 남효온의 <육신전>이 ‘잘못’됐다는 것은 ‘잘못’이 아닌가 싶다.

정연가(한국수필문학가 협회 이사)三重臣)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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