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 뒷 이야기> 54 “죽은자의 원한을 풀어 줘야!”(주)하동신문
60년대 말 어느해 여름, 우리 하동지역 관내 면사무소 책임자 급 젊은 공무원 한사람이, 출근 시간 군청에 출장을 간다하고 집을 나섰는데, 그만 종적을 감춰 행방이 묘연해졌다. 며칠 뒤 국도 2호선 근처 산등성이 소나무 밑에서 그 공무원은 죽은 시체로 발견 되었다. 옆에는 농약병이 딩굴고 있었고, 손에는 만년필이 쥐어졌더라했다.
수사 결과는 사자(死者)가 비리를 저질러 기관에서 조사를 받고 나가는 길에, 자책감에서 유서를 쓸 준비까지 했다가 그만 목숨을 끊은 것으로, 아주 간단하게 추정 처리되어 사건은 덮어졌다.
그러나 항간에 떠도는 소문은 영 그게 아니었다. 나는 50여년 전에 그 일을 두고 생각했던 바가 아직도 머리에 생생하다.『참으로 험한 세상에 살고있구나!』
나는 그때의 수사기관 수장과 사건을 맡았던 공직자들의 이름을 기록으로 남겨 두었다. 급소를 맞아 죽는 것도 하늘을 원망할 일인데, 죄까지 뒤집어 썼으니 이를 어쩌나.
옛날에도 그렇게 사람을 보내는 일 없도록 임금도 마음을 썼다.
고려 말엽, 중국 원나라에서 간행된 <무원록(無寃錄)>이라는 책이 있었다. 풀이하면 죽은자의 원한이 없도록하는 책이라는 뜻이다. 이를 테면 사람이 범죄에 의해 목숨을 잃었을 경우, 과학적 수사로 진범을 색출, 엄히 다스려 죽은자의 원한을 풀어 줘야한다는, 매우 의미 깊은 수사 지침서였다.
이책이 고려때 들어와 세종 초기까지 널리 쓰였었는데, 내용 가운데는 우리 민족의 관습과 법규에 맞지 않고, 풀이하고 이해하기가 보통 어려운게 아니었다.
이에 세종은 문제의 책을 한층 업그레이드 하여 새로 편찬 발행하였다. 세종20년(1438) 11월에 나온 <신주무원록(新註無寃錄)> 곧 그책이었다. <무원록>을 우리의 풍속과 현실에 맞게 풀이하여 재편했다는 뜻이다. 세종대왕의 혼이 담긴 이책은 곧 『살인사건 수사 지침서』로, 그때로는 유일한 과학수사 교본이었다.
예컨대 독살 사건이 발생했을 경우, 반드시 관할 지방 관청의 수장이 직접 검시(檢屍), 피부에 나타난 반점의 상태, 시체가 풍기는 냄새, 조사결과 추정되는 사망원인 등등을 세밀히 조사, 정해진 서식에 맞춰 자세하게 기록, 형조에 보고하도록 했던 것이다.
또 자살(刺殺) 당했을 경우, 칼에 찔린 상처의 길이, 너비, 상처의 깊이등을 잣대로 재고, 칼의 방향을 따져 보는 등, 시체를 검안하는 방법과, 비슷한 사례들을 수록하였으니, 더는 찾아 볼 수 없는 과학적 수사 요령이 그 책에 담겨있었던 셈이다. 뿐만 아니라 죽은자의 원한을 풀어 주기 위해, 고을 최고 수령이 직접 검안(檢案)을 하도록했던 점에 의미가 깊었다. 조선에서 널리 활용 되던 <신주 무원록>은 일본에 전해져 각광을 받았고, 뒤에 중국에까지 되돌려 전해져 유명해졌다.
세종은 참으로「대왕」이셨다. 그는 사람 취급을 받지 못하는 노비일지라도 “임금이 어찌 양민과 천민을 차별하여 다스릴수 있겠는가?”하며, 특히 천민의 목숨을 가볍게 여겨 고문으로 죄를 뒤집어 씌워 죽이는 일이 없도록 엄하게 단속하고자 이렇게 말했다.
『형벌이란 사람의 생사가 달린 것인데, 진상은 밝혀 내질 못한채 매질로 자백을 받아 내니, 죄지은 자는 교묘히 빠져 나가고 죄없는 자가 허물에 빠져 원통함을 풀지 못하게 된다. 슬프도다! 죽은자는 다시 살아 날 수없고, 형벌로 팔다리를 잘린 자는 다시 붙일 수 없으니, 한번 실수하면 후회한들 무슨 수로 돌이킬 수있겠는가.? 죄수가 순순히 자백하는 것을 좋아하질 말고, 재판이 빨리 끝나기를 바라지 말며, 여러 면으로 따져 찾고 되풀이 살펴, 죽은 자가 원한을 품은 채 구천에서 떠돌고, 목숨이 붙은 자는 온전하지 못한 몸을 이끌고 한탄을 품고 사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할 것이다. 형조(刑曹-법무부)는 이런 뜻을 깊히 유념하여 널리 알려라!』
한 마디로 죄없는 사람을 족쳐 죄를 뒤집어 씌워, 엉뚱한 사람을 죽음으로 몰아 사건을 빨리 해결하려고 서둘지 말라는 뜻이었다.
또한 대왕은 비천한 노비의 생명도 귀중하게 여겼다.
관가에 매인 노비가 아이를 생산 할 경우, 몸을 풀고 7일이 지나면 당연히 일터에 나와 노역을해야하는 규정을 고쳐, 분만 예정날을 전후하여 100일 동안 몸을 쉬어 조리하도록 하는 법규를 만들어, 갓난애와 산모가 건강하게 생명을 유지하도록 살폈다.
국토를 압록·두만강까지 넓히고, 한글을 창제, 백성을 깨우쳤으며, 생활과학 진흥으로 백성들의 삶이 편리하도록 애쓴 성군(聖君) 세종대왕의 참 모습은, 곧 대왕의 인명중시(人命重視) 사상에 새롭게 나타난다.
그 시대 벌써 고문으로 사건을 조작, 원한을 품고 죽어가는 백성이 없는 세상을 만들고자 애를 썼으니 만고에 자랑할 일이다.
정연가 (한국수필문학가 협회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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