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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왕조 뒷 이야기

<조선왕조 뒷 이야기> 55 벼락이 종묘(宗廟)를 쳤더니!

by 까망잉크 2018. 8. 1.
<조선왕조 뒷 이야기> 55 벼락이 종묘(宗廟)를 쳤더니!


 (주)하동신문   

천하에 찾아 보기 드문 성군(聖君) 세종대왕의 인간적 생애는 참으로 불행의 연속이었다. 그를 심적으로 가장 괴롭힌 최초의 사건은 첫며느리를 내쫓아야하는 맏며느리 폐출(廢黜)이었다.세종은 즉위 3년째였던 1421년 10월 여덟살이 된 원자(元子) 향(珦)을 세자로 책봉, 성격이 유순하고 자상했던 맏 아들(문종)에 대한 기대를 가졌다. 세자는 움직임에 귀인성(貴人性)이 엿보였고 신중하여 언행이 무거웠다. 그러나 어질고 자상함이 넘친 반면에, 매사를 딱 잘라서 밀어 부치는 힘이 미치질 못한 것 같았고, 몸이 강건하질 않고 허약해 보였다. 세종임금과 왕비 소헌왕후 심씨(沈氏) 내외는 그런 세자를 두고 자나 깨나 늘 마음 한 구석이 빈 느낌이었다. 마침내 세자가 장가를 들어 상호군(上護軍) 김오문(金五文)의 딸을 맞으니, 곧 휘빈(徽嬪) 김씨였다. 아니나 다를까 세자는 여색(女色)과는 거리가 멀었다. 세종은 한글연구에 몰두하며 세자에게 일찍부터 국정경험을 쌓도록 일상 정무를 맡겼고, 거기다 학문을 즐기는 천성의 세자는 책을 편 채 밤을 새우기 일쑤였으니, 빈방에 홀로 밤 새우기가 잦았던 휘빈 김씨는, 육신의 허기를 느낀 나머지 급기야 무속들이 꾸며낸 비방을 찾기 시작했다. 은밀히 얻은 비방서를 열독한 끝에, 세자의 음심을 돋구는 방법이라며 세자의 신발을 훔쳐 불태워 재를 술에 타 세자에게 마시게했다. 이 일이 들어나자 기가 막힌 세종 임금 내외는 김씨를 내쫓고 말았다. 세종11년(1429)의 일이었으니, 그때 세자 나이 16세. 두 번째 맞은 세자빈은 종부시(宗溥寺) 소윤(小尹) 봉려(奉礪)의 딸이었다. 순빈(純嬪)에 봉해진 봉씨 역시 여자를 소 닭보듯 하는 세자가 욕심에 찰리 없었다. 봉씨는 세자궁의 궁녀 출신으로 명문 사가(私家)의 요조 숙녀와는 태생적으로 인품이 달랐다. 제왕의 도리를 익히며 학문 연마에만 몰두하던 세자는, 자신의 처지를 알았음이었던가. 『내 삶의 답은 내 안에 있다』는 듯, 아버지 세종에게 매달려, 제발 전국에 금혼령을 내려 명가의 여식을 가려 뽑는 국혼(國婚)은 하지 말 것을 간곡히 청했고, 세종도 아들의 마음을 읽어 간택(揀擇)이라는 거창한 절차 없이 맏 며느리들을 맞았는데, 이번에는 하필 봉씨가 골라진 것이었다. 봉씨 역시 허전한 밤이 지겨워 소쌍(召雙)이라는 시녀와 동성애에 빠져 말썽을 일으켰다. 소쌍은 순빈 봉씨와 일을 저지르기 전에 봉씨의 또 다른 시녀 단지(端之)와 동성애 커플이던 바라, 소쌍은 봉씨와 단지를 함께 거느려 육신의 허기를 채웠던 것이다. 요즘 서구에서 합법화 바람이 불기 시작한 동성애가, 조선 초기에 궁중에서 은밀히 행해졌음이 하필 세종시대 표면으로 나타나 왕실의 체면을 구겼다. <세종실록>에 격분한 소헌왕후 심씨가 소쌍을 문초하는 과정에서 불거진 동성애 장면이 구체적으로 기록 돼있어, 읽는이로 하여금 낯을 붉힐 정도다. 결국 순빈 봉씨는 세자빈에 봉해진지 8년만인 세종1 8년(1436) 폐서인 돼 쫓겨났다.뒤를 이어 세자빈에 책봉된 세종의 세번째 맏 며느리는 지가산군사(知嘉山郡事) 권전(權專)의 딸이었다. 권 씨는 14세때 세자의 후궁으로 뽑혀 동궁에 들어와, 세자궁의 궁녀들을 지휘하는 종2품 내명부(內命婦)에 까지 올랐다가, 김씨와 봉씨가 연달아 폐출되니, 세종19년(1937) 20세 나이로 세자빈이 되었다. 권 씨는 성품이 단아하고 효행이 남달라 세종내외의 총애를 받았다. 권씨는 딸 경혜공주를 낳고 세종23년(1441) 7월 세종대왕이 갈망하던 장손 단종을 낳았다. 그러나 하늘의 실수였던가. 산모 권씨는 산통(産痛) 끝에 해산 이틀만인 그달 24일 동궁의 거처였던 자선당(資善堂)에서 눈을 감으니 나이 불과 24세였고, 세자는 그때 28세였다. 이리하여 세종대왕이 세 번째 맞았던 맏며느리도 곁을 떠나, 그해 9월 경기도 안산에 묻히는 몸이 되고 말았다.1450년 2월, 당뇨병으로 오랫동안 신음하던 세종임금이 영면하자, 세자가 홀몸으로 등극하니 곧 문종이었다. 문종은 단종의 생모 권씨를 현덕왕후(顯德王后)로 추봉하고 무덤을 소능(昭陵)으로 격상시켰다. 그로부터 2년 뒤인 1452년 5월 14일 문종이 39세로 승하하자, 오늘날의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에 능이 마련되고 현덕왕후의 유해도 옮겨 합장, 능호를 현능(顯陵)이라하고 위패를 종묘에 봉안하였다.그러나 뒤에 왕위를 찬탈한 세조가 그의 맏아들이 요절하자, 그는 단종의 생모 현덕왕후의 넋을 탓해, 종묘에서 그의 위패를 치워 버리고, 왕후 존호도 추폐해 버렸는가하면, 유해도 파내 평민의 예로 개장해 버렸다. 한참 뒤 현덕왕후 복위문제가 논란되던 중종 8년(1513) 하늘이 노했는지, 왕후의 넋이 있었음인지, 벼락이 종묘를 때려 크게 부셔지는 소동이 일었다. 조정은 비로소 깨달은 듯 현덕왕후 위패를 다시 종묘에 봉안 하고, 능은 현능 동쪽에 새로 천장 하여 왕후의 영면을 기원했다. 사람들은 『우주의 섭리』로 알았다.                       

정연가(한국수필문학가 협회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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