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 뒷 이야기> 56
500년 조선왕조 통치 이념인 유학의 맥은, 고려 말의 정몽주(鄭夢周)·길재(吉再)를 거쳐, 조선조에 들어 김숙자(金叔滋)가 받아 이었다. 김숙자는 곧 조선유학의 조종(祖宗) 김종직(金宗直)의 아버지로, 그는 유교의 정통학문을 아들 김종직에게 전한 셈이었다. 김종직이 여섯 살에 들어 학문에 눈을 뜰 즈음 김숙자는 아들에게 이렇게 타일렀다.
“학습에는 반드시 순서가 있다. 순차를 무시한 무궤도한 학습 태도는 옳지 않다. <동몽(童蒙>의 유학자설정속편(儒學字說正俗篇)을 완전히 암송한 뒤에 <소학(小學)>을 읽어야하며, 그 다음 <효경(孝經)>·<대학(大學>·<논어(論語)>·<맹자(孟子)>를 탐독하고, 다음 <중용(中庸)>을 읽어야한다. 사서(四書-대학·중용·논어·맹자)를 끝맺은 연후에 <시경(詩經)>·<서경(書經)>·<춘추(春秋)>·<주역(周易)>·<예기(禮記)> 등 5경을 끝내고, <통감(統監)> 등 사서류(史書類)와 제자백가서(諸子百家書)를 읽어야한다.
또한 궁술(弓術)을 익히는 것도 잊어서는 안된다. 그것은 때에 따라 자신을 보호할 수 있기 때문이다.”
김숙자의 본관은 선산, 12세때 길재의 문하생으로 들어가 배워 세종1년(1419) 문과에 올라 고령현감, 선산교수관, 개령현감 등을 거쳐 성균관사예(司藝)가 되었다가, 수양대군의 왕위 찬탈에 속이 상해 처갓곳인 밀양으로 낙향하고 말았다.
나이 68세, 앞서 밀양 처가에서 태어났던 아들 김종직은 25세, 아직 벼슬길에 들어서기 전이었다. 비록 벼슬은 낮았으나 학덕으로 사림(士林)의 중심에 선 김숙자는, 효성이 지극하고 가르치기를 즐겨, 친상(親喪)중에도 여막(廬幕) 곁에 서재를 지어 학동들을 가르쳐니 사람들이 감동했다.
아버지 영향을 받아 18세때 부터 성리학에 눈을 뜬 김종직은, 23세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성균관에 입학, 선비들과 어울렸다.
26세때 형과 함께 대과에 응시한 결과 형만 합격했고, 자신은 응선(應選)에 들지 못했다. 귀향 길에 병환 중이던 아버지가 세상을 뜨니, 그들 형제는 아버지에게 마지막 예를 갖추지 못함을 철천의 한으로 여겼다.
세조5년(1431) 김종직은 29세 비교적 늦은 나이로 문과에 올라 관로에 몸을 실었다. 그는 촉망 받는 인재들이 거치는 사가독서(賜暇讀書)로 학문을 연마하고, 사헌부감찰, 경상도병마평사, 이조좌랑, 수찬 등을 거쳐 운명의 함양군수가 되어, 천하의 협잡배(挾雜輩) 유자광(柳子光)과 악연을 맺았다.
함양 관아 정자(亭子) 걸렸던 유자광의 시판(詩板)을 보고, 그는 기가 막힌다며 뜯어 불살라 버렸던 것이다. 이 사실을 전해들은 유자광은 속으로 이를 갈았지만 신진 사림들을 아끼는 성종의 눈치를 살펴 살아 숨쉬는 김종직을 감히 건드리질 못했다.
이 무렵 조정은 세조를 옹립한 훈구(勳舊) 인물들과, 이들을「소인(小人) 속배(俗輩)」로 보며 도학 정치를 펼치려는 사림(士林)들로 갈라져 알력이 증폭되기 시작했다.
반대로 훈구세력은 개혁적인 사림들을「경박하고 야심찬 무리」로 폄하, 갈등의 골이 깊어 갔다. 그때의 사실(史實)들이 오늘날 「보수(保守)」에 맞서는 진보(進步)의 힘으로 작용 되는 것 아닌가 싶다.
이 무렵 훈구파의 중심인물 서거정(徐巨正)이 무려 26년간 대제학자리를 독차지, 평판이 매우 더러웠다. 백관이 흠모하는 그 자리를 비낄 경우 필경 김종직이 자리를 차지할게 뻔하다는 훈구파의 짐작에 따라 억지로 버티다가, 결국 학문이 미치지 못한 자파의 홍귀달(洪貴達)을 천거, 훈구세력들이 대제학 자리를 놓질 않았다. 이에 김시습(金時習)은
『平生可笑事(평생가소사) 평생의 웃음거리는 귀달위문장(貴達爲文章) 홍귀달이 대제학이 된 것이다』
라고 시를 지어 비웃었다.
이리하여 대제학 자리에 이르지 못한 김종직은, 그 아래 제학(提學)을 거쳐 형조판서에 이르렀다가 노환을 빌미 삼아 낙향하고 말았다.
고향 사람들이 “왜 일찍 벼슬을 그만 두었느냐?”고 묻자, 김종직은 “새로 왕이 될 분(연산군)의 눈동자를 보니 내 목이 보전 될까 두렵다!”라고 답해 주위를 놀라게했다.
성종23년(1492) 8월 1일 김종직은 62세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관직에 30년을 몸담아 대신까지 지냈으나 초옥 한칸 마련하지 못했다. 그의 청빈을 전해들은 성종이 노비 15명과 논 일곱섬지기를 사패(賜牌)로 내렸으나 극구 사양했다. 한참 뒤인 연산군4년(1498) 그가 남긴 <조의제문>이 화근이 돼, 제자 김일손(金馹孫)과 사이가 나빴던 이극돈(李克墩)과, 그에게 감정을 품었던 협잡배 유자광이 꾸민 무오사화(戊午士禍)로 부관참시(剖棺斬屍) 당하는 화를 입었다.
세자 시절의 연산군 눈동자를 보고 예견했던 일이 정확하게 들어 맞았던 것이었을까.
정연가(한국수필문학가협회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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