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 뒷 이야기> 57
(주)하동신문
연산군4년(1498) 7월, 아직은 제대로 미치기 전이라 그런대로 멀쩡했던 연산군은, 경상도 청도에서 잡혀 올라온 김일손(金馹孫)을 수문당(修文堂) 문 앞에 차려진 국청에서 반역으로 몰아 닥달 했다. 걸터 앉은 왕의 양 옆으로 전 영의정 윤필상(尹弼商)·노사신(盧思愼), 좌찬성 겸 대사헌 한치형(韓致亨), 무령군(武寧君) 유자광(柳子光), 왕의 처남 도승지 신수근(愼守勤)과 주서(注書) 이희순(李希舜) 등, 요란하게 한세상을 누린 권력자들이 둘러 서서 지켜 보고 있었다.
사관(史官)의 표본적 인물 김일손이 스승 김종직(金宗直)이 쓴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사초에 싣는 등, 세조의 흠을 들춰 기록으로 남기니, 김일손을 미워하던 이극돈(李克墩)·유자광은, 왕이 바뀐 틈을 타 갓 임금이 된 23세 혈기 왕성한 연산군을 꼬드겨 김일손을 죽이고자 일을 벌였던 것이다.
이른바 무오사화(戊午士禍).
김일손은 성종초에 과거에 올라 춘추관기사관(春秋館記事官)이 돼 <성종실록> 사초를 쓰고, 백관의 신분을 주무르는 이조정랑(吏曹正郞-인사부처 국장)이라는 요직에 올랐다가, 어머니가 별세하자 시골 청도에서 치상(治喪)에 몰두했다.
그런 가운데 김일손은 풍병을 얻어 요양중이었는데, 조정에서 달려온 의금부 낭청(郎廳-정보요원) 홍사호(洪思灝) 손에 붙잡혀 끌려와 연산군 앞에 꿇었으니, 그의 행색(行色)이 마치 황천가는 길 언저리에서 저승사자를 만난 꼴이었다.
연산군의 첫 질문은 이랬다.
“너는 사관으로써 마땅히 직필해야 하거늘, 실록에 세조께서 며느리뻘 되는 덕종의 후궁 권귀인을 욕심 냈으나 권귀인이 응하질 않았다는 헛된 사실을 쓰려했단 말이냐? 어서 들은 곳을 바른 대로 말하라!”
김일손이 대답했다.
“신이 어찌 망령되게 거짓을 쓰겠나이까? 또한 사관에게 들은 곳을 쾌 묻지 않는 것이 불문율인줄 알고 있습니다만, 정히 원한다면 말씀 드리겠습니다. 그 일은 권귀인의 조카 허반(許磐)에게서 들었습니다.”
덕종은 곧 세자시절 요절해 버린 세조의 맏아들로, 그의 아들 성종이 등극하여 왕으로 추존한 의경(懿敬)세자였고, 권귀인은 세자의 후궁이었으니, 세조 며느리뻘이 분명하였으며, 허반의 외할아버지가 권치명(權致明)이라 허반은 외가 쪽으로 권귀인의 조카였던 것이다. 아니 땐 굴뚝에 어찌 연기가 날까. 평소 세조의 인품을 독사처럼 여겼던 김일손의 귀에 그런 해괴한 소문이 잡혔으니, 그냥 넘길 김일손이 아니었다.
연산군은 근원을 더 캐 보고자 다시 물었다.
“그 권씨의 일을 쓸적에 의논한 사람이 있을 것이니 말하라!”
김일손이 되 받았다.
“국가에 사관을 둔 것은 역사를 서술하는 일을 소중히 여겼기 때문입니다. 이같이 중한 일을 어찌 감히 사람들과 의논하겠습니까? 신은 이미 본심을 다 털어 놨으니 청컨대 혼자 죽겠습니다!”
이미 삶을 포기한 듯한 김일손의 대꾸에 연산군의 추국은 바람 빠진 풍선처럼 생기를 잃었다. 이번에는 <조의제문>을 두고 물었다.
“실록은 마땅히 사실을 써야하는데, 너의 사초는 모두 헛된 것이라 어찌 실록이라 하겠느냐?”
김일손은 주저 없이 대답했다.
“세조조에 관한 일은 허반, 정여창(鄭汝昌), 최맹한(崔孟漢), 이종준(李宗準) 등에게서 들었는데, 이들이 모두 믿을 만한 자들이었기에 사실이라 여겨 쓴 것입니다.
사초에 ‘노산군의 시체를 숲속에 던져 버려 한달이 지나도록 시체를 거두는 자가 없어 까마귀와 솔개가 날아 와서 쪼았는데, 한 동자가 밤에 시체를 짊어지고 달아 났으니, 시체를 물에 던졌는지 불에 던졌는지 알 수가 없다’ 한 것은 최맹한에게 들었습니다.
신이 이 사실을 기록하고 관련하여 ‘김종직이 과거에 급제하기 전에 꿈속에 느낀 것이 있어 <조의제문>을 지어 충성스러움을 나타냈다’ 고 쓰고 사초에 그 제문을 실은 것뿐입니다”
더 묻고 따질 것도 없었다. 사초에「세조가 며느리뻘 운운」이라 썼던 김일손의 생각이, 그를 다급하게 저 세상으로 보내 버린 빌미가 됐고, 양지쪽에 버텨 앉은 훈구세력들 입김에 김종직의 제자들인 신진 사림(士林)들은 설 곳이 없어졌다. 이리하여 무려 27명의 선비들이 죽거나 귀양을 갔다.
이때 참혹하게 처형 당한 김일손·권오복(權五福)·권경유(權景裕)·이목(李穆)·허반을 사화오현(史禍五賢)이라했는데, 다행이랄까 정여창은 곤장을 맞고 함경도 종성으로 귀양 가는 것으로 처분 되었다. 그때 김일손은 35세, 문과 장원급제자였던 이목은 28세, 권오복은 32세, 모두들 아까운 나이에 세상을 등지고 말았던 것이다.
정연가(한국수필문학가 협회 이사)
'조선 왕조 뒷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조선왕조 뒷 이야기> 59 “자손이 종자가 남지 않겠구나!” (0) | 2018.08.12 |
---|---|
<조선왕조 뒷 이야기> 58 (0) | 2018.08.10 |
조선왕조 뒷 이야기> 56 (0) | 2018.08.06 |
<조선왕조 뒷 이야기> 55 벼락이 종묘(宗廟)를 쳤더니! (0) | 2018.08.01 |
<조선왕조 뒷 이야기> 54 “죽은자의 원한을 풀어 줘야!” (0) | 2018.07.30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