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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왕조 뒷 이야기

<조선왕조 뒷 이야기> 58

by 까망잉크 2018. 8. 10.

<조선왕조 뒷 이야기> 58

 (주)하동신문   

세상에는 극히 작은 꼬투리가 천하를 뒤흔든 큰 소용돌이를 낳는 경우가 더러있다. 역사의 물줄기를 틀어 버린 피맺힌 환란도, 따져 보면 하찮은 원인에서 비롯된 일이라 여겨져 아쉬워 할 때가 많다.
성종10년(1479) 6월 2일, 임금은 왕비 윤씨(尹氏)를 서인(庶人)으로 신분을 낮춰 왕궁에서 내 쫓아 버렸다. 이른바 폐서인(廢庶人), 이때 윤씨에게는 네 살 된 왕의 적장자 융(연산군)이 있었다. 
윤씨는 봉상시판사(奉常寺判事) 윤기무(尹起畝)의 딸로 본관은 함안, 얼마전 왕의 후궁인 내명부 종2품 숙의(淑儀)에 책봉 되었다가, 그 뒷해 정비(正妃) 공혜왕후 한씨(韓氏-한명회의 딸)가 소생 없이 죽자 계비(繼妃) 물망에 올랐다. 
성종7년(1476) 마침내 왕자를 낳은 윤씨는, 그해 8월 9일 계비(繼妃)에 피봉, 중궁(中宮)으로 입지를 굳혔다. 후궁에서 일약 왕비에 오른 윤씨는, 아쉽게도 부엌데기 안방마님 된 양 심통을 부려 스스로 몰락의 길에 들어서고 말았다. 솟구치는 질투심을 다스릴 줄 몰라 왕이 눈길을 주는 궁녀는 무작정 없애 버리려 독약을 구해 감춰 두기도하고, 눈에 거슬리는 후궁들은 어서 말라져 버리라는 주술(呪術)을 부리기도하였다. 
보다 못한 성종은 마침내 그런 왕비를 진작 폐해 버리려다가 영의정 정창손(鄭昌孫)의 만류로 그만 두고, 빈(嬪)으로 강등시켜 거처를 따로하며 거리를 두고자했다. 
그러나 이 일도 승지 이극돈(李克墩)과 임사홍(任士洪)의 만류로 중도에 그치고 말았다.
계비와 정이 멀어진 성종이 후궁들을 자주 찾는 가운데, 그럭 저럭 왕비 자리에 죽치고 앉았던 윤비는 한날 저녁, 드디어 하늘 같은 임금에게 앙탈을 부리다가 그만 용안(龍顔)에 손톱 자국을 내는 역사적인 사건을 저지르니, 그야말로 메가톤급 궁중 스토리를 생산한 셈이 되었다. 
아들의 얼굴에 찍힌 손톱 자국을 보고 뒤로 넘어질 뻔 놀란 인수(仁粹)대비가, 대신들에게 왕의 안면을 보이며 노발 대발했다.
성종이 마침내 「윤씨 폐서인」을 논의에 부치니, 우의정 윤필상(尹弼商) 등이 왕의 뜻을 받들어 찬성하고 말았다. 결국 윤씨는 서인으로 강등되어 친정으로 쫓겨났다. 
이어 성종11년(1480) 11월 세 번째 왕비를 맞으니, 이가 곧 정현왕후 윤씨, 그녀는 병조판서 윤호(尹壕)의 딸로 본관은 파평, 역시 후궁으로 성종의 총애를 받다가 윤비가 폐출 되는 소란 끝에 왕비 자리에 올랐던 것이다. 
성종이 한명회를 명나라 황제에게 보내 왕비를 바꿨음을 보고한 내용은 이랬다. 
『계비 윤씨는 성품이 패려(悖戾)하여 국모의 덕이 없고 과실이 많아 백성의 바램을 크게 잃었으므로, 부득이 조모 윤씨(세조비)와 어머니 한씨(인수대비)의 명을 받들어 폐하여 친정에 보내고 부실(副室) 윤씨를 처로 삼았습니다….』
그러나 장차 왕이 될 아들을 생각한 성종은, 수시로 폐비의 죄상을 써서 내시와 승지를 보내, 장막 뒤에서 읽어 주며 그녀가 허물을 고쳐 용서를 빌기 바랐고, 폐비는 날마다 눈물을 쏟으며 늬우쳤다. 
하지만 폐비를 눈에 불을 켜고 설치던 여우 보듯 미워하는 궁궐의 분위기에 서, 그런 폐비의 모습이 성종에게 제대로 보고 될리 없었다. 성종은 어느날 내시를 보내 폐비의 행실을 염탐하게하였다. 
그런데 내시는 중간에서 인수대비가 시키는 바에 따라 왕에게 거짓을 고하고 말았다. 대비의 주도 면밀한 훼방(毁謗)이었다.
“윤씨가 머리 빗고 낯 씻어 예쁘게 단장하고, 자기의 잘못을 늬우치는 기색이 전혀 없었다”
성종13년(1482) 8월 16일, 인수대비의 작계(作計)에 넘어간 왕은 마침내 폐비를 단념, 그녀에게 마시고 저승으로 떠날 사약을 보내고 말았다. 
행여 왕의 부름을 학수고대 희망했던 폐비 윤씨에게, 청천 벽력이랄까 「죽어라」는 어명이 전해졌을 뿐이다. 그때 그가 낳은 아들로 장차 연산군이 될 원자 융은 일곱살, 세 번째 왕비가 된 정현왕후 윤씨가 보살폈더니 그는 정현왕후를 생모로 알고 컸다.
폐비의 무덤은 경기도 장단에 마련됐다. 처음에는 묘비명도 없었다. 
그녀 죽음 이듬해 2월, 원자 융이 세자로 책봉되니, 왕은 세자의 어미였던 폐비의 무덤 앞에 「윤씨지묘」라는 표석을 세워 두사람 묘지기를 두고, 장단도호부사로 하여금 속절(俗節)마다 제사를 올리게하니, 이는 인간 성종의 애틋한 배려였다. 한데 세자는 까닭을 알 턱이 없었다. 지금은 회묘(懷墓)로 추봉된 그녀의 무덤이 경기도 고양 서삼능에있다. 
인과(因果)의 단초는 「사람의 마음」이다. 한 여인의 주체 못한 투기가, 22년 뒤 조정을 쑥대밭으로 만든 갑자사화(甲子士禍)라는 엄청난 환란을 불러 올 줄이야!      

정연가(한국수필문학가 협회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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