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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왕조 뒷 이야기

<조선왕조 뒷 이야기> 60

by 까망잉크 2018. 8. 13.


<조선왕조 뒷 이야기> 60

 (주)하동신문   

연산군10년(1504) 3월, 『간신(奸臣)』의 대명사로 역사에 이름이 오른 간흉 임사홍(任士洪)의 밀고로, 어미 윤씨의 죽음을 알게 된 연산군은, 그만 머리가 돌아버렸다. 임사홍은 폐비의 생모까지 대령시켜, 어미가 사약을 들이키고 죽어 가기 까지 내막을, 외할미로 하여금 원한 넘친 푸념으로 연산군에게 일러 바치게했다. 이처럼 한 나라의 군왕을 열나게 부채질한 임사홍은 과연 어떤 인물이던가.그의 본관은 풍천, 좌찬성 임원준(任元濬)의 아들이며, 효령대군의 손자사위로 벼슬이 왕의 최측근 도승지였으니, 그는 어지간히 갖춘 존재였다. 거기다가 아들 중 광재(光載)는 예종의 사위, 숭재(崇載)는 성종의 사위가 되니 그는 왕실의 척당에다 대대로 임금과 사돈을 맺은, 호사가 극에 달한 인물이었다. 이런 임사홍이 뭣이 부족하여 『간신의 표본』으로 망가지고 말았을까 참으로 모를 일이다. 아마 배움이 모자라 인격이 신분을 딸치 못한 탓이 아니던가 싶다. 옛 선인들이 말하기를 『모름지기 이름이 들어 난 자는 현실에 살지 말고 역사(歷史)에 살아라! 역사의 신(神)을 믿어라! 정의와 선(善)과 진리는 반드시 승리한다』라고했다.어미의 비참한 죽음을 외할미의 입을 통해 생생하게 들어, 그동안 감쪽같이 속아 왔음을 알아챈 연산군은 드디어 폭발했다. “대통을 계승한지 10년동안 항상 마음 속으로 근심하고 아파하면서도 어린 탓으로 제대로 알지 못했다가, 20년이 지나서야 그 사실을 알게됐다. 그때 안에서 얽어 선동한 자, 밖에서 힘써 막지 않은 자를 죄의 경중에 따라 다스려 원한을 풀고자한다” 이른바 갑자사화(甲子士禍) 막을 여는 폭탄선언이었다.가장 먼저 손을 본 사람은 성종의 후궁 귀인 정씨(鄭氏)와 엄씨(嚴氏). 두 후궁은 인수대비 옆에서 폐비 윤씨를 틈나는 대로 꼽씻었던 성종의 총빈(寵嬪)들. 임사홍과 외할미로 부터 폐비와 인수대비, 두 후궁사이에 얽혔던 비벼 꼰 자초지종을 들은 연산군은, 폐비의 죽음을 세 여인들 탓으로 돌려, 어미의 원한을 갚아 아들 된 도리를 하겠다는 듯 활극을 연출했다. 밤낮을 가릴 틈이 없이 밤중에 정·엄 두 귀인을 끌어냈다. 여인 둘을 각각 커다란 푸대에 넣어 묶어 마당에 딩굴게하고는, 귀인 정씨 소생 두 아들 안양군과 봉안군을 불러, 푸대 하나씩을 맡아 다짜 고짜 몽둥이로 두들겨 패게했다. 이를테면 자식으로 하여금 어미를 때려 죽이도록 판을 벌린 것이었다. 하늘 아래 어찌 이런 혹형이 있을까. 용케도 엄귀인에게는 아들이 없었다. 어명인지라 안양군은 푸대속에서 비명 지르는 여인이 누구인 줄 모른채 몽둥이를 휘둘러 조용하게 만들었는데, 봉안군은 어미들임을 짐작하고 버텼다. 그러자 연산군은 직접 칼을 뽑아 귀인 정씨를 찔러 죽이고는, 두 시신을 내수사(內需司)에 보내 살을 발라 젖을 담궈 산천에 듬성 듬성 던져 버리게했다.물론 안양·봉안군 두 왕자도 살아 남질 못했다. 더 기막힌 일은 눈에 핏발이 선 연산군이 자다가 급보를 받고 현장에 달려온 할머니 인수대비를 머리로 받아 실신시켜 버린 일이다. 인수대비는 그로부터 한달간 앓더니 그길로 그해 4월 27일, 골치 아픈 이승을 등지고 말았다. 파란만장했던 생애 68년, 따져 보면 손자에게 목숨을 앗긴 셈이었다. 다음은 폐비사건 때 조정 원로로써, 혹은 고위 직위에서 어미의 죽음을 막지 않았던 신료들에 대한 억지 분풀이였다. 아직 살아있는 신하들을 대역죄인으로 몰아 죽인 일도 어거지였는데, 이미 죽어 땅에 묻힌 원로들의 무덤을 파헤쳐 해골의 목을 쳐, 염라대왕도 기막혀 할 짓을 벌였으니, 참으로 연산군 다운 기발한 화풀이였다. 부관참시(剖棺斬屍) 당한 한치형(韓致亨)·한명회(韓明澮)·정창손(鄭昌孫)·어세겸(魚世謙)·심회(沈澮)·이파(李坡)·김승경(金升卿)·남효온(南孝溫)·김천령(金千齡) 등 아홉 고인(故人)들, 무슨 법도에 이런 형벌이 규정돼 있었는지 귀신이 놀랄 죽음 뒤의 날벼락이었다. 한치형은 인수대비 4촌 아우로 영의정을 지낸 그때의 정계 원로, 한명회는 영의정으로 한때 세상을 들었다 놨다했던 성종의 장인, 정창손은 사육신을 고변, 세조의 왕업을 다진 원훈, 어세겸은 성종때 대사헌을 역임하고 연산군때 좌의정에 올랐던 정계의 거물, 심회는 세종대왕의 처남으로 역시 영의정을 지낸 공신, 이파는 성종때 좌찬성에 오른 성리학자, 김승경은 성종때 대사헌 등을 역임하며 성종으로부터 특별히 금띠를 하사 받았던 명신, 남효온은 김종직(金宗直) 문인으로 지난번 무오사화 때 죽음에서 누락됐던 생육신 일원,  김천령은 대과에 장원급제, 성종때 사헌부집의에 이르러 35세 나이로 지난해 죽었기에 아직 사체가 부식이 덜된 채 칼을 받았다. 생목숨을 잃은 신료들의 면면은 다음호에 살펴 본다.   

정연가(한국수필문학가 협회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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