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 뒷 이야기> 61
호를 추강거사(秋江居士)라하여 「추강선생」으로 알려진 남효온(南孝溫) 은 본관이 의령, 그의 선대에 조선개국공신으로 받들 만큼 태조 이성계(李成桂)가 지극히 신뢰했던 영의정 남재(南在)가 있어, 남효온은 곧 남재의 5대손이었다.
병조의랑에 올랐던 고조부 남경문(南景文)은 일찍 세상을 떴었고 증조부 남간(南簡)은 청백리로 예문관직제학에 이르렀다.
할아버지 남준(南俊)은 사헌부감찰, 아버지 남전(南恮)은 불행히도 요절하니 남효온은 홀어머니 밑에서 자라긴 했으나, 태어난 배경은 남달랐다. 그는 태종의 외손자로 20대에 병조판서에 올랐던 남이(南怡) 장군의 재당질이며, 좌의정 이원(李原)의 외증손이기도하여, 친·외가에 걸쳐 태어난 텃밭이 매무 기름졌다.
남효온은 성품이 담박(澹泊)하고 호방 강개하며, 학문에 독실하고 지조와 절개가있었다. 일찍이 김종직(金宗直) 문하에 들어가 배웠는데, 그를 눈여겨 본 스승 김종직은 늘상 그를「우리 추강」이라 호칭하며 다른 학동처럼 함부로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 그는 세속을 피해 절개를 무겁게 여기는 20세 연상의 김시습(金時習)을 흠모, 세상 밖에서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살려하더니, 나이 18세때 그만 일을 저지르고 말았다.
그는 단종의 생모 현덕왕후 권씨의 복위를 청하는 상소를 올려, 성종 치세의 훈구세력을 자극했다. 보통 청소년으로서는 감히 생각 조차 못할 일을했던 것이다. 풋내기 어린 선비의 상소문은 영의정 정창손(鄭昌孫), 도승지 임사홍(任士洪)이 중간에서 뭉개 버리니 임금 성종은 알턱이 없었다.
그때만해도 감히 누구도 입에 못담을 왕실의 금기(禁忌)를 끄집어 냈으니 사람들은 그를 미치광이라했다.
자신의 뜻이 좌절 당하자 실망한 남효온은 세상이 싫어졌다. 실력을 가늠해본 진사과에는 급제하였으나 대과에는 마음이 없었다. 어머니가 조르고 타일러 문과에 나가긴해도 벼슬에 관심이 없어 힘쓰질 않았다.
그는 <육신전>을 쓰고 시를 지으면서 매양 세상일에 불만을 들어내, 과격한 논조로 바른 말하기를 꺼리지 않다가, 문우(文友) 정여창(鄭汝昌)·김굉필(金宏弼) 등으로 부터 원망을 듣기도하였다. 결국 남효온은 비관 끝에 몸을 해쳐 성종23년(1492) 39세 일기로 눈을 감고 말았다.
그로부터 10여년 뒤인 연산군 10년, 김종직의 제자들이 몰죽음을 당한 무오사화때는 이미 저승 식구가 되었었기에 화를 피했다가 이번 갑자사화때 단종생모 복위 상소와 김종직 문인임이 불거져 부관참시 대상에 그 이름이 올라, 경기도 고양의 그의 무덤이 파헤쳐져 해골이 훼손 되니, 연산군은 그의 유골을 양화도(楊花渡) 나룻터 모래밭에 버리라했다. 그의 부인과 사위 넷, 외아들 충세(忠世)가 있었는데, 아들도 처형 당하는 혼란 속에 그의 유골은 행방을 알 수가 없게 되고 말았다.
남효온의 외아들 남충세는 정신이 약간 부실한 장애자였다. 그러나 경우는 발라 아버지를 온전히 모시지 못한 죄가 크다며 “함께 죽이라!”고 큰 소릴 치는데 조금도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형리(刑吏)가 그를 불쌍이 여겨 “본래 미친 병자니 인간으로 칠 것도 못됩니다”하고 살려 두자 했으나, 연산군은 사람 죽이는데 이골난 임금이라 싸늘하게 내 뱉었다.
“미친 자가 세상에 살면 무엇하겠느냐? 죽여 버려라!”하니, 도부수(刀斧手)의 칼이 사정없이 그를 베고 말았다.
남효온의 며느리인 남충세의 아내는 호군 조견지(趙見知)의 딸로 절개가 굳었다. 그녀는 형장에 쓰러져 딩구는 남편의 시신을 지키다가 3일째 되던 날 밤중에, 죽어 추위에 뻗뻗하게 얼어버린 남편의 시체를 집으로 옮겼다. 혹한에 시신이 얼어 염습을 할 수가 없었다. 조씨는 밤새워 남편의 시체를 부둥켜 안고 통곡, 자신의 체온으로 꽁꽁 언 시신을 녹혀 손수 염습하고 관속에 넣었다. 그리하여 장사와 제사를 예법에 따라 정성을 다해 치르니 사람들이 모두 탄복하였다. 참으로 대담했던 남효온의 며느리였다.
중종반정으로 연산군이 폐해지고 세상이 바뀌니 조정은, 남효온을 이조판서, 그의 아들 충세는 사복시정에 추증, 두 부자의 행적을 기렸다.
남충세의 한 딸이 예조판서 유여림(兪汝霖)의 며느리로 출가하니, 남편이 생원 유관(兪관)이었고, 그 아들에 유홍(兪泓)이 태어났다.
유홍은 명종8년(1553) 문과에 올라 여러 벼슬을 거치며 시관(試官)이 되었을때는 율곡 이이(李珥)를 장원급제 시키기도했고, 충청·전라·경상·함경·평안도관찰사를 두루 역임한뒤 한성판윤에 올라 많은 치적을 쌓았다.
남효온이 남긴 시문은 그가 화를 당할 때 후환이 두려워 대부분 감춰지고 유실 되었었는데, 그의 외증손 유홍이 널리 수집하여 <추강집>을 발행, 후세에 전해지게 되었고 숙종때 유홍의 증손 유방(兪榜)이 더욱 증보 개간하여 오늘날에 전한다.
정연가 (한국수필문학가협회 이사)
호를 추강거사(秋江居士)라하여 「추강선생」으로 알려진 남효온(南孝溫) 은 본관이 의령, 그의 선대에 조선개국공신으로 받들 만큼 태조 이성계(李成桂)가 지극히 신뢰했던 영의정 남재(南在)가 있어, 남효온은 곧 남재의 5대손이었다.
병조의랑에 올랐던 고조부 남경문(南景文)은 일찍 세상을 떴었고 증조부 남간(南簡)은 청백리로 예문관직제학에 이르렀다.
할아버지 남준(南俊)은 사헌부감찰, 아버지 남전(南恮)은 불행히도 요절하니 남효온은 홀어머니 밑에서 자라긴 했으나, 태어난 배경은 남달랐다. 그는 태종의 외손자로 20대에 병조판서에 올랐던 남이(南怡) 장군의 재당질이며, 좌의정 이원(李原)의 외증손이기도하여, 친·외가에 걸쳐 태어난 텃밭이 매무 기름졌다.
남효온은 성품이 담박(澹泊)하고 호방 강개하며, 학문에 독실하고 지조와 절개가있었다. 일찍이 김종직(金宗直) 문하에 들어가 배웠는데, 그를 눈여겨 본 스승 김종직은 늘상 그를「우리 추강」이라 호칭하며 다른 학동처럼 함부로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 그는 세속을 피해 절개를 무겁게 여기는 20세 연상의 김시습(金時習)을 흠모, 세상 밖에서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살려하더니, 나이 18세때 그만 일을 저지르고 말았다.
그는 단종의 생모 현덕왕후 권씨의 복위를 청하는 상소를 올려, 성종 치세의 훈구세력을 자극했다. 보통 청소년으로서는 감히 생각 조차 못할 일을했던 것이다. 풋내기 어린 선비의 상소문은 영의정 정창손(鄭昌孫), 도승지 임사홍(任士洪)이 중간에서 뭉개 버리니 임금 성종은 알턱이 없었다.
그때만해도 감히 누구도 입에 못담을 왕실의 금기(禁忌)를 끄집어 냈으니 사람들은 그를 미치광이라했다.
자신의 뜻이 좌절 당하자 실망한 남효온은 세상이 싫어졌다. 실력을 가늠해본 진사과에는 급제하였으나 대과에는 마음이 없었다. 어머니가 조르고 타일러 문과에 나가긴해도 벼슬에 관심이 없어 힘쓰질 않았다.
그는 <육신전>을 쓰고 시를 지으면서 매양 세상일에 불만을 들어내, 과격한 논조로 바른 말하기를 꺼리지 않다가, 문우(文友) 정여창(鄭汝昌)·김굉필(金宏弼) 등으로 부터 원망을 듣기도하였다. 결국 남효온은 비관 끝에 몸을 해쳐 성종23년(1492) 39세 일기로 눈을 감고 말았다.
그로부터 10여년 뒤인 연산군 10년, 김종직의 제자들이 몰죽음을 당한 무오사화때는 이미 저승 식구가 되었었기에 화를 피했다가 이번 갑자사화때 단종생모 복위 상소와 김종직 문인임이 불거져 부관참시 대상에 그 이름이 올라, 경기도 고양의 그의 무덤이 파헤쳐져 해골이 훼손 되니, 연산군은 그의 유골을 양화도(楊花渡) 나룻터 모래밭에 버리라했다. 그의 부인과 사위 넷, 외아들 충세(忠世)가 있었는데, 아들도 처형 당하는 혼란 속에 그의 유골은 행방을 알 수가 없게 되고 말았다.
남효온의 외아들 남충세는 정신이 약간 부실한 장애자였다. 그러나 경우는 발라 아버지를 온전히 모시지 못한 죄가 크다며 “함께 죽이라!”고 큰 소릴 치는데 조금도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형리(刑吏)가 그를 불쌍이 여겨 “본래 미친 병자니 인간으로 칠 것도 못됩니다”하고 살려 두자 했으나, 연산군은 사람 죽이는데 이골난 임금이라 싸늘하게 내 뱉었다.
“미친 자가 세상에 살면 무엇하겠느냐? 죽여 버려라!”하니, 도부수(刀斧手)의 칼이 사정없이 그를 베고 말았다.
남효온의 며느리인 남충세의 아내는 호군 조견지(趙見知)의 딸로 절개가 굳었다. 그녀는 형장에 쓰러져 딩구는 남편의 시신을 지키다가 3일째 되던 날 밤중에, 죽어 추위에 뻗뻗하게 얼어버린 남편의 시체를 집으로 옮겼다. 혹한에 시신이 얼어 염습을 할 수가 없었다. 조씨는 밤새워 남편의 시체를 부둥켜 안고 통곡, 자신의 체온으로 꽁꽁 언 시신을 녹혀 손수 염습하고 관속에 넣었다. 그리하여 장사와 제사를 예법에 따라 정성을 다해 치르니 사람들이 모두 탄복하였다. 참으로 대담했던 남효온의 며느리였다.
중종반정으로 연산군이 폐해지고 세상이 바뀌니 조정은, 남효온을 이조판서, 그의 아들 충세는 사복시정에 추증, 두 부자의 행적을 기렸다.
남충세의 한 딸이 예조판서 유여림(兪汝霖)의 며느리로 출가하니, 남편이 생원 유관(兪관)이었고, 그 아들에 유홍(兪泓)이 태어났다.
유홍은 명종8년(1553) 문과에 올라 여러 벼슬을 거치며 시관(試官)이 되었을때는 율곡 이이(李珥)를 장원급제 시키기도했고, 충청·전라·경상·함경·평안도관찰사를 두루 역임한뒤 한성판윤에 올라 많은 치적을 쌓았다.
남효온이 남긴 시문은 그가 화를 당할 때 후환이 두려워 대부분 감춰지고 유실 되었었는데, 그의 외증손 유홍이 널리 수집하여 <추강집>을 발행, 후세에 전해지게 되었고 숙종때 유홍의 증손 유방(兪榜)이 더욱 증보 개간하여 오늘날에 전한다.
정연가 (한국수필문학가협회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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