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 뒷 이야기> 62 조지서(趙之瑞)는 어딨느냐?
생물 가운데 인간은 동물계(動物界) 사람과에 속한다. 사람이 다른 동물과 다른 점은 감정(感情)이 많다는 것이다. 세상은 간단하고 진리는 한가닥인데, 언제나 감정이 복잡한게 탈이다.
장차 임금이 될 싹수가 노란 세자를 바르게 가르쳐 보려고 엄하게 다루다가, 잇빨을 갈 만큼 감정을 앞세운 연산군에게 목숨을 앗겨 삶이 비틀어져 버린 악례(惡例)의 장본인이 곧 조지서였다.
조지서는 단종2년(1454) 오늘날의 하동 옥종 삼장(三壯)마을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임천(林川), 그의 아버지 조찬(趙瓚)은 사헌부감찰이었는데 그가 여덟살 들던 해 그만 세상을 떴다. 조지서는 아버지와 동갑 친구인 이웃 선비에게서 배웠는데, 그때 진주 목사가 또한 아버지와 동년배 벗이라 어느날 어린 조지서를 찾아 보고 말하기를,
“조 감찰이 비록 조세(早世)하였으나, 이 아해(兒孩)가 반드시 세상을 울리는 사람이 되어 아버지를 빛낼 것이다!” 했다. 그만큼 조지서는 어려서부터 강명(剛明)한 기품이 엿보였던 것이다. 그가 세 번 장원했다하여 그가 태어난 마을을「삼장원동」이라했는데, 진실은 이랬다.
그는 성종5년(1474) 2월 생원(生員)·진사(進士) 두 시험에 모두 장원하였으나, 한사람에게 두 분야에 걸쳐 장원을 줄 수없다는 규정에 따라 진사시는 2등에 꼽혔다. 같은 해 왕실의 경사(慶事)를 기념하며 베푼 정시(廷試)에 나가 급제하고, 성종10년(1479) 중시(重試)에 또 장원급제, 승문원저작(著作)에서 형조좌랑으로 특진했다. 같은해 명나라가 여진족의 건주위(建州衛)를 정벌할 때 조선에 원병을 요청하니, 조정에서는 우찬성 어유소(魚有沼)를 서정대장(西征大將)에 임명, 군사 1만명을 보내는데 조지서를 종사관으로 삼아 출병시켰다.
그러나 압록강 얼음이 풀려 도하작전에 실패, 회군하고 말았다. 이 일로 어유소는 유배당했으나, 조지서는 성종이 특별히 “문학에 뛰어난 인물이니 서용하라!”는 특명을 내려 구제했다. 이리하여 그는 경연시독관(經筵試讀官)에 세자시강원보덕(世子侍講院輔德)을 겸하니, 이른바 왕이 받는 교양강좌 강사와 세자의 훈육을 맡은 직위를 겸한 셈이었다.
「보덕」은 정3품 직으로 훗날 그가 가르친 세자가 왕위에 오를라치면 고위직이 보장되는 매우 촉망받는 자리였다. 그러나 조지서는 운이 딸치 않았다. 인간사 새옹지마(塞翁之馬)라 했던가, 성종이 챙겨 준 반석이 죽음의 도마가 될 줄이야 누가 알았을까.
그때 세자를 훈육한 같은 직위의 인물로, 성격이 조지서와 대조적인 허침(許琛)이 있었다. 세자시절의 연산군은 황패각혹(荒悖刻酷)한 성품에 놀기만 즐겨 학문을 남의 일인 듯 피하고 책을 벌레 보듯했다.
그런 세자를 허침은 언제나 부드럽게 타일러 가르치려했고, 조지서는 경직(硬直)한 성격을 감추지 않고 다뤘다. 언젠가 세자가 강론을 듣는둥 마는둥 딴전을 피우자 조지서는 세자 앞에 책을 내동댕이 치며,
“저하(邸下)가 이렇도록 학문에 힘쓰지 않으면 신이 마땅히 주상에게 계달(啓達)하겠나이다!” 했다. 이를 아버지께 일러 바치겠다는 협박으로 받아드린 세자는, 마음 속으로 치를 떨었다. 어느날 세자는
『조지서는 대 소인이요, 허침은 대 성인(聖人)이라』라는 글을 써 강론장 벽에 붙이니, 이를 본 신료들이 세자의 속셈을 읽어 조지서의 장래를 걱정하기도했다.
일이 터지기 까지는 그리 멀지 않았다. 1494년 12월 29일, 추위 속에 연산군은 왕위에 오르고, 조지서는 임금을 피해 창원부사로 내려와 몸을 사렸다. 그러나 조지서는 폭정으로 사람 목따는 일을 매일의 일과로 삼는 연산군의 심뽀가 세자시절 그대로라, 부질없는 벼슬을 팽개치고 향리 지리산 아래 삼장원동에 숨어 버렸다.
연산군10년(1504) 연산군은 생모가 죽을 무렵의 대소 신료들을 몰살한 「갑자사화」를 연출하는데, 전혀 관련이 없는 조지서를 찾아 발을 굴리며 눈알을 부라렸다. “조지서는 어디있느냐?”
이리하여 한양으로 끌려간 조지서는 그해 윤4월 16일 목숨을 잃었다. 나이 51세. 연산군은 10여년 전의 감정이 북바쳤는지 특별히 조지서의 시신을 토막 내 맷돌에 갈아 한강에 던져 버리는 혹형을 가해 분을 푸는 듯했다.
그의 처 정씨(鄭氏)는 포은 정몽주(鄭夢周)의 현손녀로 절의가 넘쳤다. 그녀는 울면서 한달음에 한양으로 올라가 남편의 시신이 떠 내러간 말없는 한강을 굽어보며 한참을 통곡하더니, 입었던 치마를 벗어 강물에 적셨다. 남편의 혼령을 치마에 담았다고 여긴 정씨는 젖은 치마를 고이 안고 삼장원동으로 내려와 이른바 초혼장을 치렀다.
이리하여 오늘날의 옥종 대곡리 삼장마을 뒤에 마련된 조지서의 묘소는, 세상에는 둘이 없는 치마무덤이다. 세상이 바뀐 중종반정 뒤 조지서는 도승지에 추증되고, 절부(節婦) 정씨는 정문(旌門)이 세워졌다.
정연가(한국수필문학가 협회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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