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 뒷 이야기> 63 성희안(成希顔), 목숨을 걸었다.
『증오(憎惡)가 변질 되는 순간, 사람은 짐승 보다 못한 존재가 된다.』
『범좌자의 가장 치명적인 착각은, 「내가 이렇게 된 것은 너희가 그렇게 만들었기 때문이다」라는 생각을 갖는 것이다.』
광폭한 내면 성격 소유자 연산군이, 본성을 들어 내는 데는 시간이 별로 걸리질 않았다. 그는 12년 집권기 초반에 두번 사화를 통해 엄청난 인명을 죽이더니, 자신감이 붙은 듯 사람잡는 폭정은 갈수록 더했다. 가장이 망가지면 집안이 거덜 나지만, 임금이 미치면 나라가 통째로 흔들린다.
얼굴만 반듯하다 싶으면 여염집 아낙도 내키는 대로 잡아 눕혀 겁탈했고, 사냥터가 좁다며 민가를 헐어 산짐승들이 뛰고 노는 놀이터로 만들었다.
거추장스런 신하들을 모조리 도륙하거나 쫓아 내 버린 연산군은, 국정의 중심인 대궐을 완전히 거대한 요정으로 만들어, 매일 같이 향연을 베풀어 기생은 말할 것도 없고, 여염집 아낙, 심지어 왕실 친족까지 가리질 않고 성적 노리개로 삼으니, 마치 색욕을 채우고자 세상에 나온 듯 했다.
이때 궁중으로 끌려 들어온 기생을 「흥청」이라하니, 곧「마음껏 즐긴다」는 뜻의 「흥청거린다」는 말이 생겼고, 「연산군이 흥청 때문에 망했다」하여 「흥청 망청」이란 말이 퍼졌다.
세종때 내시(內侍)가 되어 연산군까지 내리 일곱 왕을 섬겼던 백발의 김처선(金處善)이, 왕의 보기 사나운 꼴이 지겨워, 「소 귀에 경(經)읽어 주는 격」으로 “임금 노릇 제대로하라” 했다가 무참하게 죽음을 당했다. 연산군이 직접 김처선의 다리를 잘라도, 김처선은 주저 앉은 채 말을 멈추질 않자 혀를 잘라 버렸다. 그래도 손짓을 하며 중얼거리는 김처선을 연산군은 직접 활을 쏴 숨통을 끊었다.
김처선의 본관 「전의」를 없앴고, 이름자의「처」자가 징그럽다며「처」자를 못쓰게 했다. 24절기 하나인 「처서」를 「조서」로 고쳐 읽으라는 기가 막힌 어명까지 내렸다.
임금의 비행을 꼬집는 한글로 된 익명서가 나돌자, 고조부 세종대왕이 만든 훈민정음 사용을 금하고 한글서적을 모조리 불태워 한글을 못쓰게 했다. 세종대왕을 무척이나 원망하지 않았던가 싶다.
연산군을 몰아 낸 중종반정(中宗反正)을 기획, 일을 꾸민 인물은 전 이조참판 성희안이었다. 그의 본관은 창녕, 돈녕부판관 성찬(成瓚)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조선 둘째 왕 정종의 손자 딸이라, 왕실의 외손이었다.
성희안은 학문이 깊은 데다 성격이 소탈하고 뜻이 대범했다. 그런 성희안을 눈여겨 본 성종이 그를 정사(政事)의 고문격으로 삼아 자주 챙겨 주니, 등극 초기의 연산군도 성희안을 인정, 그를 일약 이조참판 겸 오위도총부 부총관에 임명, 백관의 인사와 군무까지 관장하는 막강한 자리에 앉혔다. 그러나 왕의 패악을 지켜 본 성희안의 마음은 달랐다.
어느날 연산군이 양화도 월산대군 별장에서 잔치를 열고 중신들에게 시를 짓게했더니, 성희안이 지어 올린 시 가운데 이런 구절이 있었다.
『聖心元不愛淸流 …』 풀이하면, 『우리 임금께서 원래 청류를 좋아 하지 않았는데…』였다. 시문을 읽은 연산군은 ‘성희안이 필경 자기를 풍자·훈계하는 구나’ 라고 짐작, 괘씸한 생각에서 그날로 성희안을 무관직 종9품 부사용(副司勇)으로 좌천 시키고 말았다.
이를테면 오늘날의 행정안전부 차관에 군부의 고위 핵심 직을 겸했던 정권 실력자를. 무관 말직에 맡은 책무가 없는 병졸로 강등 시켜 버린 꼴이었다.
연산군12년(1506) 9월 2일, 마침내 성희안은 박원종(朴元宗)·유순정(柳順汀) 등과 함께, 목숨을 건 반정을 일으켜, 성종의 계비 정현왕후 윤씨의 아들이며, 성종의 차자였던 진성대군을 왕으로 삼았다. 옥좌에서 끌어 낸 연산군을 강화도 교동으로 보내 버리고, 이튿날 9월 3일 마침내 새 임금 즉위식을 거행하니, 이가 곧 중종(中宗)이다.
폐출된 연산군은 그해 11월 6일 죽었다. 오늘날의 서울특별시 도봉구 방학동에 자리한 그의 묘지는, 그냥「연산군지묘」라는 표석만 있을 뿐 아무런 장식이 없어 초라하다. <연산군 일기>로 통칭 되는 그의 재위 기록 첫머리에 사가들은 이렇게 기록했다.『…만년에 더욱 황음하고 패악한 나머지 학살을 마음대로하고, 대신들을 많이 죽여서 대간과 시종 가운데 남아난 사람이 없었다. 심지어 포락(단근질), 착흉(산채로 가슴빠개기), 촌참(寸斬=토막내 죽이기), 쇄골표풍(碎骨飄風=뼈를 갈아 바람에 날리기) 등 형벌까지 있어서…』
반정에 목숨을 걸었던 성희안은 확 바뀐 세상의 국정쇄신에 힘쓰고, 중종8년(1513) 4월 영의정에 올랐다. 그러나 그는 석달 뒤인 그해 7월 53세 일기로 숨지고 말았다. 그의 병이 위중하다는 전갈을 받은 중종은 급히 「경의 아들 율을 특별히 당상(堂上)으로 올려 나의 망극한 정을 표시하노라」라는 글을 보내, 임종을 앞둔 성희안을 위로했다.
정연가(한국수필문학가 협회 이사)
'조선 왕조 뒷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조선왕조 뒷 이야기> 65 (0) | 2018.08.29 |
---|---|
<조선왕조 뒷 이야기> 64 “돼지가 닮은 그 자와 어떤 관계냐?” (0) | 2018.08.27 |
<조선왕조 뒷 이야기> 62 조지서(趙之瑞)는 어딨느냐? (0) | 2018.08.20 |
<조선왕조 뒷 이야기> 61 (0) | 2018.08.17 |
<조선왕조 뒷 이야기> 60 (0) | 2018.08.13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