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 뒷 이야기> 68 춤추는 저두(猪頭)대감
중종1년(1506년) 9월 초이틀. 흉칙했던 군왕 연산군이 마침내 쫓겨났다. 그 무렵 지구 저편에는 무슨 일이 있었을까? 동서양의 판이한 문화적 차이가 흥미롭다.
유럽에서는 컬럼버스·아메리고 베스푸치·바스코 다 가마 등 탐험가들이 아메리카 대륙·인도·남 아프리카 등지를 발견, 신천지를 개척하기 시작했고, 레오날드 다빈치·미켈란젤로 등이 <모나리자>·<최후의 만찬>·<다비드 상> 등 명작들을 창작했다. 이탈리아에는 이른바 문예부흥이라 불리우는 르네상스 운동이 일어났고, 로마 교회가 면죄부를 판매, 사람들의 원성이 높은 가운데 종교개혁 기운이 싹텄다.
연산군을 몰아 낼 결심을 굳힌 성희안(成希顔)은, 믿고 손잡을 마땅한 인물이 없었다.
전 경기도관찰사 박원종(朴元宗)이 제격이긴 하나 낯이 설어 접근하기가 조심스러웠다. 궁리 끝에 성희안은 이웃의 신윤무(辛允武)에게 박원종의 뜻을 살펴 달라했다. 마침내 신윤무를 통해 속셈을 알게된 박원종을 성희안이 집으로 찾았더니, 박원종은 성희안의 손을 덥석 잡고 울면서 평생을 충의(忠義)를 위해 함께하자 했다.
“마땅히 죽음으로써 나라에 몸을 바칠 것이다. 남아가 죽고 사는 것은 명이있는데, 어찌 종사의 위태로움을 보고 구하지 않으리오!”
두 사람은 곧 이조판서 유순정(柳順汀), 무과에 갓 급제한 박영문(朴永文), 사복시첨정 홍경주(洪景舟) 등 거사 동지들을 규합, 9월1일 밤 일을 꾸몄다.
이들은 야음을 틈타 서둘러 훈련원에 집결, 미리 짠 작전 계획에 따라 창덕궁 안에 진을 치고 장졸들을 요소에 배치하였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 살기가 도성에 가득찼으나 백성들은 전혀 동요함이 없이 일이 성사되기 만을 비는 것처럼 고요했다.
이튿날 9월 2일, 연산군은 장단(長湍) 석벽(石壁)에 놀이를 가려했는데, 밤중에 대신을 비롯한 중신들이 반정군의 철퇴에 죽어 나자빠지는 등 변란이 터져 버린 것이었다.
광화문 앞에서 말탄 자세로 부채를 휘둘러 군사를 지휘하는 박원종의 모습이 신(神)처럼 보였다. 전장의 광계토대왕이 그랬을까?
신윤무와 용사(勇士) 이조(李藻)가 먼저 연산군의 처남 좌의정 신수근(愼守勤)·병조판서 신수영(愼守瑛)을 철퇴로 쳐 죽이고, 추악한 간신 임사홍(任士洪)을 묻지도 않고 까 버렸다. 정승 신수근이 이조의 철퇴에 골이 빠개져 말에서 떨어지는데, 따르던 몸종이 몸을 던져 신수근을 받자 이조는 다시 철퇴를 휘둘러 종을 함께 골로 보내 버렸다.
이날 이조는 혼자 정승과 판서 등 넷을 해 치우니, 그의 얼굴과 옷이 피철갑 됐다.
또한 연산군의 총애를 받던 전동(田同)·김효손(金孝孫)·강응(姜凝)·심금종(沈今種) 등 무리들을 모조리 닥치는 대로 목을 따 장대에 매달아 세웠고, 옥문을 열어 무죄한 백성들을 모두 풀어 주자 그들은 춤을 추며 환호했다.
날이 밝자 간밤의 변란을 눈치 챈 신하들이 입을 닫고 연산군에게 아뢰지 않으니 왕은 멍청이에 불과했다. 한참 뒤 왕은 수상한 기미를 느껴 편전 앞에 앉아 승지들을 불러 다그쳤다. 모자라도 한참 모자란 머저리였다.
“이와 같은 태평성대에 어찌 다른 변이 있으랴! 아마 흥청들이 모여 도둑질을 했는가 보다! 즉시 정승과 금부당상을 불러 처치하라!”
그의 호령은 이미 허공에 울려 퍼지는 개짓는 소리만도 못했다.
이윽고 왕을 따르던 시위 군사들이 슬금 슬금 자리를 피해 버리니 연산군 옆에는 울부짓는 후궁들과 분냄새 풍기는 창기(娼妓)들 뿐이었다.
박원종 등은 유자광(柳子光)·이수남(李秀男)에게 연산군을 잡아 도망가지 못하게 평시서(平市署) 옆 민가에 가두어 지키도록 하고, 진성대군 옹립 절차를 신속히 밟아, 마침내 새 임금 중종이 옥좌에 앉았다.
감금 중이던 연산군이 끌려 나오는데, 거리에는 만세를 부르고 눈물을 흘리며 감격하는 백성들로 가득찼다. 특히 성주에서 즉석 처형감으로 끌려 오다가 흑고양이를 만나 죽음을 면해, 서둘러 올라온 장순손(張順孫)은, 뒤집어진 세상이 너무 기뻐 덩실 덩실 춤을 추는데 참으로 가관이었다. 그는 얼굴이 돼지를 닮아 별명이 저두대감이었다.
연산군의 핏줄은 적출로 아들 둘과 딸 하나, 서출에 아들 둘 딸 하나가 있었다. 적장자 이황은 세자에 책봉 되기까지 했으나 정선에 유배 당해 후손 없이 죽었고, 둘째 이인(李仁)은 창녕대군에 책봉 됐으나 뒤에 칭호도 없어져 결혼도 못한 것으로 기록 됐다.
서장자 이성(李誠)은 양평군으로 책봉됐다가 칭호가 벗겨지고 후사도 없다. 둘째 이돈수(李敦壽)는 아무 대접도 받질 못했다. 연산군의 적녀는 공주 작위를 삭탈 당해 구문경(具文璟)에게 시집가 아들 구엄을 낳았는데, 구엄이 연산군을 시봉했다. 서녀는 신기홍에게 시집가 4남 4녀를 낳았다.
역사의 가치는 배움이다. 치욕의 연산군 시대사는 만고의 교훈이다.
정연가 (한국수필문학가 협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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