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 뒷 이야기> 70
간특하기로 이름난 유자광(柳子光)은 남원사람으로 본관이 영광(靈光), 아버지 유규(柳規)는 황해도관찰사 겸 병마절제사를 역임하고 경주부윤이 됐을때 뇌물을 바치는 약삭 빠른자가 있어 그를 형벌로 다스리다가 그만 죽게 만든 사달로 인해 고향에 은거해 버린 비교적 바른 벼슬아치였다.
어느날 유규(柳規)가 낮잠을 자는데 꿈에 큰 호랑이가 집안으로 들어오는 것이었다. 깜짝 놀라 잠에서 갠 유규는 큰 인물을 잉태 할 징조로 여겨, 발설하면 효험이 없다며 입을 꾹 다물고 대낮에 마누라를 덮쳐 치마속을 더듬으며 달겨 들었다. 놀란 아내가「무슨 개수작이냐!」며 도망쳤다.
몸이 단 유규는 마침 채전(菜田)에서 일하다가 들어오는 여종을 벗겨 건드렸더니, 아니나 다를까 괴물 유자광이 생겼다.
유규의 생각대로 유자광은 보통내기가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출신이 밝질 못해 갈 길이 아득했다. 두뇌 회전이 빠른 유자광은 무술로 출세하고자 마음을 다져, 열심히 칼쓰고 활쏘기로 몸을 길렀고 글 공부도했다.
출세길을 찾아 서울로 올라간 유자광은 힘자랑을 하며 자기의 능력을 과시한 벽보를 만들어 요소에 붙였더니, 조정에 알려져 세조가 불렀다. 세조는 유자광을 시험 삼아 궁문을 지키는 갑사(甲士)로 발탁됐다.
세조13년(1467) 마침 함경도에서 「이시애(李施愛)난」이 일어났다.
유자광은「옳다구나!」싶어 반란 평정에 나가기를 자원하였다. 세조가 기특하게 여겨 그를 종군시켰더니, 유자광은 반란진압에 큰 공을 세우고 개선했다. 세조는 유자광을 서출이라는 멍에를 벗겨 일약 병조정랑으로 기용했더니, 이듬해에는 또 별시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했다.
이리하여 문무를 겸한 인재로 두각을 나타낸 그해, 유자광은 직속 상관인 병조판서 남이(南怡)가 역심을 품었다는 모함으로 물어 뜯어 죽음에 이르게 하니, 그때의 철없는 어린 임금 예종은 유자광을, 반역의 뿌리를 뽑았다는 공훈을 씌워 그를 익대공신 1등에 무령군(武靈君)으로 봉군까지했다.
음험하면서 재능까지 겸한 유자광은 아버지 유규의 꿈대로 조정 중신의 반열에 들어선 큰 인물이 된 셈이었다.
그러나 그는 출세에 눈이 가려진 패악한 성품으로, 연산군때 무오사화와 갑자사화를 일으킨 원흉으로 지목 되니, 사람들이 이를 갈기 시작했고 조정 신료들은 그를 독사(毒蛇)로 여겼다.
그러나 중종반정 때 약삭 빠르게 연산군을 배신하고 반정 주도인물 박원종(朴元宗)에게 붙어, 세상이 바뀐 뒤에도 입지가 더하여 정국1등공신에 책록되고 무령부원군으로 승차했다.
그런 유자광이 어느날 도총관으로 입직하면서 소매 속의 부채를 꺼내 펴 부치려다가 갑자기 얼굴빛이 검어지며 뇌까렸다.
“기이하다! 부채에 쓰인 글씨가 괴이하도다!”
하며 놀랐다. 부채에 『危亡立至』넉자기 새겨져 있었으니, 곧 「위태롭고 망할 일이 닥쳐 온다」는 뜻이 아닌가. 누군가가 그의 부채에 몰래 글귀를 갈겨 놨던 것이다.
유자광의 탄식 한숨이 끝나지 않았는데, 대간의 상소로 그를 강원도 해변으로 귀양 보내라는 어명이 떨어진 것이었다. 아울러 유자광의 두 아들 유진(柳軫)·유방(柳房)도 멀리 함경도로 귀양 보내 버렸다.
중종 등극 이듬해, 사간원, 홍문관, 예문관 이른바 3사가 일제히 유자광 탄핵상소를 올리니, 역시 하늘은 뜻이 있어 유자광을 편드는 자가 아무도 없었다.
다급해진 유자광이 박원종에게 애원했다.
“나와 박공이 함께 무인으로 숭품(崇品)에 올라 문사(文士)들이 헐뜯는데, 입술이 없으면 이가 찬 법이라 내가 배척 당하면 다음은 박공이 아니겠오!?”
「내가 죽으면 너도 죽는다」는 야비한 협박이었다. 여론과 유자광의 출처를 일찍부터 알고 있는 박원종은, 기가 막힌다는 듯 대꾸했다.
“조정에서 그대에게 이를 간지가 오래였오. 그대가 일찍 사퇴하지 않았던게 한이로다”
중종2년(1507) 4월 23일, 유자광과 그의 아들들은 모든 직첩과 훈적이 벗겨진 채 멀리 멸망의 길로 들어섰다.
유자광은 속마음에 너무 충격을 받아 그만 눈이 멀어 버렸다. 역사에 이런 기록이 전한다. 『자광이 서얼(庶孼)로서 졸지에 일어나 시국에 어려움이 많음을 틈타, 간특한 꾀를 써서 모략으로 일을 만들기를 좋아하여 착한 사람들을 모조리 없앴다.』
유자광은 강원도 해변에서 앞을 못 보는 머저리로 궁하게 살다가 1512년 6월 죽었다.
태어난 해를 몰라 더럽게 누린 연치(年齒)를 모른다. 조정에서 두 아들에게 아비 장사 지내기를 허락했으나, 둘 다 계집에 빠지고 술에 찌들어 들은 척도 않했다.
정연가(한국수필문학가협회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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