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주청의 사랑방 이야기 (239)무송<상>
무과 급제 후 3년 넘도록 발령장도 못 받은 ‘박무송’
답답한 마음에 한양으로 가 병조판서 집에 갔다가…
무과에 급제한 지 3년이 지났건만 도대체 발령장을 받을 수 없어 목을 빼고 기다리던 박무송은 단봇짐 하나 꾸려서 한양으로 올라갔다. 병조판서 집 대문 밖에는 같은 처지의 젊은이들이 한숨을 토하며 줄을 서 있었다. 한나절을 기다려 어둠살이 내릴 때 무송이 만난 사람은 병조판서가 아닌 이 집 집사인 판서의 손위 처남이었다. 행랑방에서 무송과 마주 앉은 구렁이 같은 집사의 입에서 구역질 나는 개소리가 나왔다. “야, 이 답답한 사람아. 팔짱만 낀 채 십년, 백년을 기다려봐라. 발령장이 나오나!” 빙빙 둘러댔으나 결론은 삼만냥을 갖고 오라는 얘기다.
무송이 고개를 숙인 채 끓어오르는 분을 짓눌렀지만 허사였다. “임금은 궁궐에 피를 뿌리고 주색잡기에 빠진 간신들은 매관매직에만 매달리고….” 나지막이 말하고 벌떡 일어난 무송이 옆차기로 집사의 얼굴을 찼다. ‘꽥!’ 집사는 외마디 소리를 남기고 목이 꺾여 즉사했다.
무송은 침착하게 나와 문지기에게 말을 전하라 했다. “집사 어른께서 오늘은 면담을 그만하겠답니다.” 문지기가 큰소리로 알리자 대문 밖에서 기다리던 서너명이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무송은 부랴부랴 성 밖으로 빠져나가 고향 쪽이 아닌 동쪽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발령이 문제가 아니었다. 이제는 살인자, 그것도 병조판서의 처남을 때려죽여 놨으니 무조건 도망치는 일밖에 할 수 없었다. 밤에는 산속에서 새우잠을 자고 낮에는 장이 서서 사람들이 법석거리는 고을만 찾아가 배를 채우고 떠났다. 두루마기는 벗어 던지고 소매와 바짓단이 짧은 일복을 사 입은 무송은 머리띠를 질끈 동여맨 뒤 망태를 하나 사서 산속으로 들어가 약초꾼 행세를 했다. 심산유곡에 숨어 있는 절로 들어가 중이 될 작정이었다.
터벅터벅 소백산 자락 도솔고개를 넘는데 갑자기 봉두난발에 긴 칼을 든 두놈이 소나무 위에서 뛰어내리며 무송을 가로막았다. 무과에 급제한 무송의 눈에는 수수막대기를 든 아이들처럼 보였다.
무송이 외쳤다. “뭐 하는 놈들이냐!” “이놈 봐라, 겁이 없네. 목숨은 살려줄 테니 산삼이나 하수오를 캤으면 내놓고 가렸다, 이놈.” 후다닥 퍽퍽. 순식간에 산적 두놈이 너부러졌다. 무송은 칡넝쿨을 잘라 산적 두놈을 묶었다. 술 냄새가 솔솔 풍겼다. 개울에 담가 놓은 호리병을 들고 왔다. 목마르던 차에 벌컥벌컥 탁배기를 나발 불던 무송. 불현듯 중이 되려던 생각이 바뀌었다. 산적이라는 놈들이 어리바리했다.
두놈을 앞세워 길도 없는 숲길을 얼마나 올랐을까. 한사람이 겨우 빠져나갈 만한 바위 협곡 앞에 다다르자 바위 위에서 보초가 활을 겨눴다. 묶인 두놈이 고함쳤다. “두목을 만나게 해달라네.” 산길을 돌아 산채에 다다랐다. 나이 지긋한 두목 앞에 무송이 서자 여기저기 움막에서 산적들이 모여들었다. “나도 여기서 함께 살고 싶소.” 무송이 여차여차해서 병조판서 처남을 때려죽이고 여기까지 오게 된 사연을 얘기하자 가만히 듣고 있던 두목이 말했다. “내가 관상을 좀 보네. 믿음 준 사람을 배신할 상은 아니야.” 소나무 위에서 뛰어내렸다가 혼쭐이 난 두놈이 두목에게 자신들이 당한 일을 얘기하자 두목이 빙긋이 웃었다.
“여봐라, 돼지 한마리 잡으렷다.” 돼지를 잡고 독에서 술을 걸렀다. 산적들은 그날 밤 통째로 술독에 빠졌다. 무과에 급제한 인재가 나라를 지키는 무관이 돼야 할 터인데, 나라를 어지럽히는 산적이 됐으니 기가 막힐 노릇이다.
산적의 머릿수는 모두 열일곱이었다. 여자도 둘 있었다. 두목은 잡아 온 여자와 살고 있었고, 또 한 산적은 아이가 둘이나 딸린 조강지처와 살고 있었다.
한달쯤 지나자 무송이 한사람 한사람의 내력을 알게 됐다. 처음부터 남의 재물을 강탈해서 살겠다고 산적이 된 사람은 한명도 없었다. 부잣집 머슴을 살다가 새경을 떼이고 낫을 휘두른 사람, 장리쌀을 쓰다가 목줄이 달린 밭뙈기를 모두 날린 사람, 부인이 겁탈당하고 목을 매 홀아비가 된 사람…. 하나같이 한을 품은 사람들이었다.
달포쯤 지난 어느 날, 산채에서 사건이 터졌다. 산적 한명이 두목의 여자와 간통하다 들통이 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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