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조주청의 사랑방 이야기

조주청의 사랑방 이야기 (240)무송<하>

by 까망잉크 2018. 9. 14.

 

 

조주청의 사랑방 이야기 (240)무송<하>

 
   

술에 잔뜩 취한 두목, 부하들을 모아놓고 폭탄선언을 하는데…
 


두목은 늙었고 다리를 절룩거렸다. 칼을 빼 들고 자신의 여자와 간통한 부하놈을 죽이겠다고 따라갔지만 역부족. 그놈은 잽싸게 숲속으로 사라졌다.

아침부터 술을 퍼마신 두목이 마당에 부하들을 모아놓고 폭탄선언을 했다. “나는 늙고 지쳤네. 이제는 산채에 있어봤자 짐만 될 터, 하산하려 하네. 처자식도 보고 싶고. 우리 산채를 제대로 꾸려갈 사람은 단 하나, 무송이네!” 떠나려는 두목을 모두가 막아, 그날 밤 질펀하게 환송잔치가 열렸다. 간통한 부하 산적도 숲에서 나와 꿇어앉아 두목에게 술잔을 올렸다.

무송은 보름 전 도솔고개에서 한양으로 올라가는 뇌물을 털어 곳간에 보관해둔 것을 꺼내 두목의 단봇짐에 넣어줬다. 얼떨결에 산채 두목이 된 무송이 두목의 여자인 무실댁에게 두목을 따라갈 거냐고 물었다. 무실댁은 고개를 저었다.

무실댁은 조강지처가 아니었다. 십오년 전, 양반 대가에 시집갔으나 아이를 못 낳는 석녀라 십이년을 죄인처럼 고개를 못 들고 살았다. 그러다 신랑이 아이를 업은 시앗을 데리고 본가에 들어오자 집을 나왔다. 시아버지가 거금을 싸주고 가마를 내어줬는데, 친정으로 가다가 도솔고개에서 산적들에게 잡혀 산채로 끌려와 산적 두목의 마누라가 됐던 것이다.

아이 못 낳는 석녀라고 남정네와의 잠자리를 피하거나 싫어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더욱 적극적이다. 열두해 전, 무실댁이 산채에 잡혀 와 두목의 여자가 됐을 때는 두목 밑에 부하가 셋뿐이었다. 부하들은 “형수님, 형수님” 하며 무실댁을 깍듯이 대했고, 두목도 매일 밤 무실댁을 안았다. 항상 고개를 떨구고 얼굴에 수심이 가득 찼던 무실댁이 산채에 잡혀 와서는 고개를 들고 만면에 웃음을 달고 다녔다.

호사다마라던가. 이듬해, 관군에 쫓기던 두목이 왼 다리에 독화살을 맞았다. 목숨은 건졌지만 그 후로 절룩거리며 영 힘을 못 쓰게 됐다. 매일 밤 두목 품에 안겨 잃어버린 세월을 찾는가 싶던 무실댁이 또다시 한숨을 토하기 시작했다.

한편 산적 두목 무송의 눈에는 산채의 허점이 한두가지가 아니었다. 먼저 무송은 아이들, 조강지처와 살림을 차린 오만복에게 식솔과 함께 먹고살 만큼 전대를 채워준 뒤 그를 하산시켰다. 산채는 기동성이 생명인데, 관군이 쳐들어오면 오만복네는 산채 전체의 짐이 되기 때문이었다.

무송은 돼지와 닭을 키워 산적들 보신을 시키고, 체계적으로 훈련하고, 규율을 잡아 강군을 만든 뒤 백성의 고혈을 짜내는 현감을 치리라는 원대한 계획을 세웠다. 사기를 진작하기 위해 막걸리도 빚었다. 무송은 똘똘 뭉친 의적이 될 거라고 흐뭇하게 생각했다.

그런데 툭하면 산적들이 주먹다짐을 하고 때로는 칼을 들고 싸웠다. 큰 다툼, 작은 다툼 할 것 없이 거기엔 무실댁이 끼어 있었다. 치마 두른 한 여자를 두고 수컷 열다섯명이 쟁탈전을 벌이는 것이었다. 무송은 산적들 배만 채워서는 안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여자를 잡아 오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도솔고개를 넘어가는 가마를 덮쳐 새 신부를 잡아 올 수도 있고, 세도가 자제들이 기생을 데리고 천렵할 때 그녀들을 빼앗아 올 수도 있었다. 다만 기동성이 떨어질까 봐 있던 여자도 내려보냈는데, 새 여자를 데려올 수는 없는 일. 그럼에도 혈기방장한 남정네 사이에 고기와 술 말고도 또 빠질 수 없는 게 여자다.

무송이 무실댁을 불러 술 한잔을 따랐다. 주거니 받거니 하다가 무송이 본론을 털어놓았다. 무실댁이 펄쩍 뛰었다. “무실댁, 나도 무과에 급제한 놈인데 산적 두목이 됐소. 여기 사람들 한사람 한사람 한 맺힌 사연 있는 거 무실댁도 알잖소. 다 좋은 사람들이오.” 무송의 말에 무실댁은 눈물을 떨구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튿날 산채에서 가장 큰 움막인 두목 집으로 무실댁이 이사 갔고, 무송은 무실댁의 움막으로 갔다. 무실댁이 옮겨간 두목 집에 주막 홍등을 켰고 무실댁은 주모가 됐다. 산적들 모두의 연인이 된 것이다. 무송도 예외는 아니었다. 잃어버린 세월을 찾는 무실댁에게도 밑지는 장사가 아니었다. 산채의 사기는 하늘을 찔렀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