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주청의 사랑방 이야기 하인살이
평소 행실이 개차반인 ‘일도’
어느 날 들이닥친 불청객들 그를 어디론가 끌고 가는데…
풀벌레 소리만 여기저기서 적막을 깨고 밤은 깊어 삼경일제, 일도는 술에 취해 비틀거리며 집에 왔지만 대문 앞에 서자 술이 확 깼다. 엄한 아버지 조 대감이 깰세라 일도는 담을 돌아 늘어진 감나무 가지를 잡고 담을 넘어 뒤뜰로 갔다. 부엌에 딸린 방엔 아직도 불이 켜져 있었다. 살금살금 걸어가 문틈으로 봤더니 하녀 삼월이가 바느질하고 있었다. 시월상달에 혼인 날짜를 받아놓은 삼월이가 제 혼수를 장만하고 있었던 것이다.
조 대감의 외동아들, 열여섯살 일도가 삼월이 방문을 열고 들어가 술 냄새를 쏟으며 발버둥 치는 삼월이를 덮쳤다. 늙은 행랑아범이 뛰어와 뜯어말리자, 미수에 그친 일도는 낫을 들어 행랑아범에게 휘둘렀다.
이튿날 아침, 광목으로 팔을 감싼 채 마당을 쓰는 행랑아범을 보고 조 대감이 연유를 물었다. 행랑아범은 담을 고치다가 팔을 조금 다쳤다고 얼버무렸다.
너그럽고 후덕한 조 대감에게서 어떻게 저런 씨가 나왔는지…. 일도는 개차반이다. 그에게는 아버지 조 대감을 빼놓고는 세상 무서운 게 없다. 치마만 둘렀다 하면 마흔이 넘은 과부 찬모도 겁탈하고, 늙은 하인들 뺨을 후려치는 건 예사. 젊은 하인들은 곤장을 맞기 일쑤였다.
가을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어느 날, 술에 취한 일도가 곤히 잠에 빠진 새벽녘. 쾅쾅 별채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일도가 신경질을 내며 누구냐고 소리쳤다. ‘쿠다당’. 밖에서 발로 차서 넘어진 문짝이 일도를 덮쳤다. 횃불에 장검 날이 번쩍이고, 컹컹 짖어대던 누렁이는 장검 일합에 목이 달아나버렸다. 이게 꿈인가 생신가. “야, 이놈들. 우리 아버지가 누군 줄 아느냐.” 와들와들 떨던 일도가 고함치자 무뢰한의 두목인 듯한 자가 방바닥에 장도를 꽂고 ‘헐헐’ 웃고 나서 말했다. “우리는 의금부에서 나왔다. 천하 역적 조 대감은 벌써 귀양길에 올랐다. 잔말 말고 오랏줄이나 받으렷다.” 사지가 묶인 일도는 자루 속에 구겨 넣어진 채 말 등에 걸쳐졌다.
한나절도 넘게 달리던 말이 멈춰 섰고 말 등에서 자루가 땅바닥으로 떨어졌다. 자루를 풀자 일도가 나왔다. 어느 큰 기와집 안마당에서 정자관을 쓴 대주가 너부러진 일도를 발로 툭툭 차며 말했다. “이놈이 역적 조 대감의 아들이냐. 네놈 목숨을 부지한 걸 다행으로 여겨라. 오늘부터 너는 이 집 종이니라.” 매의 눈을 한 행수 하인에게 끌려가 일복으로 갈아입은 일도는 부엌 앞 하수구를 청소하라는 명을 받았다. 하수구 옆에 앉아 울기만 하다가 행수 하인에게 흠씬 두들겨 맞은 후에야 썩은 냄새가 코를 찌르는 하수 오니를 두 손으로 걷어냈다. 이튿날 행수 하인은 통시에 똥이 찼다며 똥을 치워서 밭에다 뿌리라고 했다. 일도는 똥지게를 지고 가다 넘어져 똥물을 뒤집어썼다. 개울에서 온몸을 씻었건만 냄새가 났다. 하인들이 방에 들어오지 못하게 해 일도는 굴뚝 옆에서 거적때기를 덮고 잤다.
‘조정에서 무슨 정변이 일어났나? 아버지는 어디로 귀양을 갔나?’ 물어볼 데가 없었다. 하인들은 아무것도 몰랐다. 일도는 행수 하인에게 매 맞지 않는 날이 없었다. 한달이 지나니 삐쩍 말라 반쪽이 됐다.
어느 날 밤, 행수 하인이 일도를 입고 왔던 비단옷으로 갈아입히고 자루 속에 구겨 넣었다. 그리고 말 등에 얹어 밤새도록 달렸다. 말이 멈추고 자루가 ‘쿵’ 바닥에 떨어졌다. 행수 하인은 말고삐를 당겨 다시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여기가 어딘가?” 살펴보니 바로 자신의 집 대문 앞이었다. 행랑채에 불이 켜져 있었다. 일도가 봉창을 두드렸다. 행랑아범이 대문을 살짝 열어주며 말했다. “도련님 늦으셨군요?” 일도가 행랑아범 방으로 들어가 왕방울만 하게 눈을 뜨고 물었다. “도대체 어떻게 된 것이오?” “도련님이 엊저녁에 외출을 했잖아요.” “아버님은?” “주무십니다.” 일도는 자기 볼을 꼬집었다. 이게 꿈인가, 생시인가. “한달여 전에 정변이 일어나지 않았소?” “정변이라니요?”
이튿날 새까맣게 얼굴이 탄 데다 피골이 상접한 일도를 보고도 온 집안 식구들은 태연했다. 일도는 사람이 달라졌다. 술도 끊고 하인과 하녀에게도 착한 도련님 소리를 들었다. 책을 가까이하기 시작했다. 어렴풋이 아버지 조 대감이 일을 꾸몄다는 걸 짐작한 건 3년 후 초시에 합격하고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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