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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왕조 뒷 이야기

<조선왕조 뒷 이야기> 88

by 까망잉크 2018. 10. 20.

<조선왕조 뒷 이야기> 88 양다리 걸치기 신수근형제들

권력 마당에는 권력에 빌붙어 한몫 보려는  기회주의자들이 득실거리기 마련이다. 「필요악」이랄까 권력을 움켜지려「죽기 아니면 살기로」 설치는 사람에게는, 충성을 바치겠다며  알랑거리는 해바라기들을 잘 골라 쓰는 지혜가 반드시 필요하다. 잘못하면「양다리 걸치기」에 별 재미를 보지 못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지난날의 역사에서 흔히 봐 온 「과거의 찌꺼기」가 아닐까? 장본인은 두고 두고 지탄의 대상으로 사람들의 기억에 남아있다.


반정으로 갑자기 왕이 된 중종에게는, 대군시절 맞이한 어여쁜 대군비(大君妃)가 있었다. 그녀는 거창 신씨(愼氏) 수근(守勤)의 딸로, 열세살 때 열두살 든 진성대군(중종)과 혼인, 궁궐 식구가 됐다. 
그 무렵 아버지 신수근은 이조판서였고, 할아버지 신승선(愼承善)은 세종대왕의 손자사위로, 임금 연산군의 장인이라, 국구신분에서 영의정을 역임한 거창부원군이었으니, 신씨는 임금의 처조카에 제수(弟嫂)이기도 한 왕의 중첩된 척족이었으니, 세상에 없는 화려한 복을 타고 난 것 같았다. 


그러나 세상은 변통이 있기 마련이다. 연산군이 쫓겨 나고 그의 친정이 쑥대밭이 될 줄을 누가 알았으랴! 거기에는 그의 친정 아버지인 진성대군의 장인 신수근의 어정쩡한 태도가 문제였다.


반정 모의를 완벽하게 짠 박원종(朴元宗)이 장차 왕으로 옹립할 대군의 장인 신수근을 찾아 갔다. 
신수근은 이미 벼슬이 높아 백관의 우두머리 영의정 자리가 바라 보이는 좌의정이었다. 
박원종은 장기(將棋)를 한판 두자고 청해 마주 앉았다. 그는 장기짝을 몇 번인가 이리 저리 움직이더니 갑자기 궁(宮)을 바꿔 놓고 속셈을 들어 내 신수근의 눈빛을 살폈다. 
그러자 신수근도 눈치가 있어 장기판을 밀치며 얼굴색을 붉히고 외쳤다.
“내 머리를 베라!”
박원종은 실망했다. 일단 신수근의 마음을 돌릴 수는 없다고 단정하고 그의 태도를 지켜 봤다. 그런데 신수근의 행동이 이상했다. 
반역 모의를 즉시 조정에 알려, 역모의 무리들을 타격하는 일을 벌여야함에도 움직임이 전혀 없지 않은가? 박원종은 신수근의 태도를 두고「양다리 걸치기」를 하고 있는게 분명하다고 짐작, 죽여 없애기로 작정했다. 


신수근은 혁명이 실패하면 남매(男妹) 사이인 연산군이 왕위를 여전히 지킬 것이고, 장차 세자가 등극하면 왕의 외숙부로 권좌를 누릴 수있는데다, 혁명이 성공할 경우 또한 사위가 왕이 되어 자신은 국구가 되니, 「이러나 저러나 양다리 걸치기」로 안이하게 권력을 누리려하는것으로 박원종에게 비춰지고 말았다. 


한편 박원종은 신수근의 아우로 형조판서를 지낸 개성부유수 신수겸(愼守謙)에게 사람을 보내 거사에 가담 할 것을 권했더니, 그도 역시 신수근의 생각과 다를 바가 없었다.
“우리 형제들 마음이 정해진지 오래이니 내 형에게 물어 보라!”
그들 형제들은 힘을 쓰지 않더라도 「누리는 권좌」는 흔들리지 않을 것으로 믿고 건방을 떨고있다고 짐작한 박원종은 입술을 굳게 깨물었다.


반정 거사 날, 맨 먼저 죽여야 할 반혁명 분자로 신수근 형제들이 지목 돼, 신윤무(辛允武)·이심(李심) 등이 수각교에서 신수근을 살해하고, 개성부로 역사(力士)를 보내 신수겸을 철퇴로 박살내 버렸다. 또한 신수근 3형제의 가운데였던 신수영(愼守英)도 관직이 형조판서였는데 함께 죽음을 당하고 말았다.


사실 그들 3형제는 연산군이 비록 포악하더라도 세자가 총명하니, 그럭 저럭 세월이 흐르다 보면 세자가 왕위에 올라 새 세상이 열 릴 수있다는 희망을 갖고, 박원종의 거사를 반대했던 것인데, 목숨을 건 박원종은 자신의 반역 모의를 알고도 묵인한 태도를 두고 「양다리 걸치기」로 몰아 부치고 말았던 것이다. 「고래 싸움에 새우 등터진다」는 격으로 대군비 신씨는, 친정 형제들의 반혁명적 행위에 연좌돼 왕위에 오른 남편을 두고 폐가가 돼버린 친정으로 쫓겨 가야했다.


중종은 정이 든 신씨를 지키고자 안간 힘을 썼으나 반정 공신들의 우격다짐에 맥을 쓸 수없었다. 
중종이 새로 맞은 장경왕후 윤씨가 원자(뒤에 인종)를 낳고 엿새만에 산후병으로 죽자, 중종은 조강지처 신씨를 왕비로 맞아 들여 갓난 원자를 돌보게 하려고 공신들에게 메달렸으나 역시 힘이 모자라 뜻을 이루지 못했다. 참으로 맥빠진 제왕이었다.


신수근 형제들의 안이한 「순간적 오판」이「양다리 걸치기」라는 오해를 불러 이처럼 엄청난 후유증을 남긴 것이었다. 


신씨는 명종12년(1557) 슬하 없이 71세로 숨졌는데, 한참 뒤인 영조15년(1739) 비로소 단경(端敬)왕후로 추봉돼 왕비 대접을 받으니 시작과 끝이 이처럼 극명했다.

정  연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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