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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왕조 뒷 이야기

<조선왕조 뒷 이야기> 86

by 까망잉크 2018. 10. 16.


<조선왕조 뒷 이야기> 86(주)하동신문
예나 지금이나 정치판에는 권력을 쟁취하는데 빚을 지게 마련이다. 
현명한 권력자는 중국의 고사에서 보듯 빚쟁이들을 멀리하고 바른 정치를 하려 지혜를 짰지만, 경륜이 모자라는 권력자는 국민의 뜻은 도외시한 채 빚을 갚느라 국정을 흐트려 크게 후유증을 남긴다.
성종의 첫 왕비로 연산군의 생모였던 폐비는 함안 윤씨 기무(起畝)의 딸이었고, 후비로 맞은 정현왕후(貞顯王后) 윤씨는 벌문(閥門) 파평윤씨 호(壕)의 여식으로, 이가 훗날 자다가 왕이 된 진성대군(晉城大君), 즉 중종의 생모였으니, 대군시절의 중종은 연산군입장에서는 사이가 매끄럽지 못한 배 다른 형제였다. 
다행히 정현왕후가 연산군을 친자식처럼 돌봤더니 어린 연산은 생모가 따로 있었던줄을 몰랐고, 훗날 사실을 알고도 나이 열두살이나 아래인 갓난이 진성대군을 피붙이로 여겨 어루며 정을 주기도했다. 
하나 점점 패악해지고 머리가 돌기 시작한 연산은, 차츰 철이 들고 목소리가 굵어지는 진성대군이 밉게 보이기 시작했고, 진성대군도 눈치가 살아 자주 살기를 띄고 날뛰는 형의 일그러진 모습을 보고 두려움을 품지 않을 수없었다. 
연산군10년(1504) 3월 30일, 연산군은 생모를 헐뜯었던 선왕의 후궁 정씨 소생 두 왕자 안양군·봉안군을 닦달, 그들의 생모 정씨와, 정씨와 단짝이던 귀인 엄씨를 몽둥이로 패 명줄을 끊게하고, 밤중에 그길로 정현왕후 침전으로 두 왕자를 끌고가, 대비자리에서 전전긍긍하던 정현왕후에게도 겁을 먹였다. 
사실은 후궁에서 왕후가 된 정현왕후도, 성종이 세자(연산군)를 걱정, 폐비를 다시 복위시키려할 때, 한사코 반대했던 일을 연산군이 모를리 없다고 짐작, 편한날이 없던 참이었다. 
“대비는 빨리 나와 보시오!”
생모를 핍박했던 정·엄 두 후궁을 죽인 그 아들들이 죽는 꼴을 보이려는 연산군의 속셈은, 『여차하면 당신도 이런 꼴 된다!』는 시위가 아니었을까 여겨진다. 와중에 떠는 사람은 곧 진성대군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어느날 연산군이 진성대군을 불러 사냥을 함께하자했다. 
거역할 수없던 대군은 엉거주춤 따라 나섰더니, 사냥은 하는둥 마는둥 하던 연산군이 느닷없이 대군에게 「말달리기 내기를 하자」고 제안하였다.
“나는 흥인문(興仁門-동대문)으로 들어 갈테니, 너는 숭례문(崇禮門-남대문)으로 들어오라. 네가 만약 나보다 늦게 들어오면 군율로 다스리겠다!”
일방적으로 정한 코-스였고 제멋대로 결정해 버린 목숨을 건 내기였다. 
대군은 속으로 ‘오늘 꼼짝없이 죽는구나’ 싶어 안절 부절했다. 왕은 승마 실력도 있는 데다 준족(駿足)의 큰 말을 탔고 더구나 왕이 가려는 흥인문쪽은 숭례문쪽 보다 훨씬 가까웠으니, 대군은 드디어 덫에 걸리고 말았다는 생각에 잠기고 말았다. 
이때 하늘이 도왔던지 곧 구세주가 나타났다. 성종의 후궁 숙용 심씨 소생 서(庶)형제 영산군(寧山君) 이전(李전)이 귓속말로 용기를 안겼다.
“대군은 걱정 마오! 내 말이 왕의 말보다 더 빠르니 내게 맡기시오!”
이리하여 영산군은 재빨리 말잡이 옷차림을 갖춰 말 고삐를 잡고 대군을 태워 쏜살 같이 달려 한발 앞서 대궐 문앞에 이르렀다. 한참 늦게 연산이 헐레벌떡 달려오니 대군은 가까스로 군율(죽음)을 면할 수있었다. 이 일로 진성대군은 영산군을 생명의 은인으로 여기게 되었다.
대군이 왕위에 오른 중종2년(1507)년 8월, 바뀐 세상에 뒤숭숭한 일들이 자주 벌어졌다. 서얼 출신 노영손(盧永孫)이 출세의 길을 모색하느라 고변했다. 
반정공신이던 이과(李顆)가 승진이 늦은데 불만을 품고 반역을 도모, 중종의 서 형제인 견성군(甄城君) 이돈(李惇)을 추대하려는 기미를 들췄다. 
들어 얹힌 왕자 견성군은 가만히 놀다가 역모의 수괴로 변해 처형되고 말았다. 사실 그는 매우 억울했으나 지난날 연산군의 비위를 잘 맞추어 호사를 누린 일로, 아무도 그를 변명해 주질 않았으니 살아 남을 방도가 없었다. 사람은 정도를 지키며 사는게 더 없는 좥삶 테크좦가 된다.
중종8년(1513) 역시 중종반정 공신 공조판서 박영문(朴永文)이 대간의 탄핵을 받아 파직되더니 반역을 꾀해 영산군 이전을 추대하려했다. 이번은 의정부 노비 정막개(鄭莫介)의 고변으로 터졌다. 
역시 조용히 유유자적하던 영산군이 그만 죽게 된 것이었다. 
이 일로 그전에 이과를 고변했던 노영손처럼 정막개도 융숭한 상을 받아 벼슬이 당상관에 이르렀고, 박영문 처형과 함께 영산군은 겨우 죽음을 면해 먼 곳으로 귀양을 가야했다. 
중종은 옛날 자기의 목숨을 살려낸 영산군의 억울함을 뻔히 알면서도, 혁명공신들에게 진 빚 때문에 현단(賢斷)의 힘을 잃었다.
 정 연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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