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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왕조 뒷 이야기

<조선왕조 뒷 이야기> 87

by 까망잉크 2018. 10. 17.


<조선왕조 뒷 이야기> 87(주)하동신문 
고변(告變)의 사전적 의미는「잘못」을 권력자에게 알리거나 크게는 역모(逆謀)를 고발하는 것이다. 어느 조직에나「고변」의 소지는 비일비재하다.「문제가 되는 일」을 발견한 자가 미리 큰 변통을 막으려는 정의감에서의 고변은, 「반드시 존재해야 할 순기능」이다. 
요즘 실권자들이 두려워하는「내부 고발」제도가 그런게 아닌가 싶다. 
그러나 이걸 역이용하는 파렴치한들이 판을 치는 세상은 혼란스럽고 부작용을 낳기 마련이다. 
오늘날의 시골 작은 조직 안에서도 자신의 허물을 감추거나 혼자만의 영달을 위해, 묵묵히 일하는 동료를 모함, 없는 일을 꾸며 고변하고, 경륜이 모자라는 지휘관은 은밀한 말에 현혹 당해,「들어 얹힌」말없는 조직원을 핍박, 이가 갈리는 감정을 사기도한다. 이런 일이 왕조시대 궁궐에서 일어 난다면「거명」당한 자는 재수 없게 목숨을 내 놔야했다. 
자다가 역모의 수괴가 되어 죽임을 당한 왕자들도 많았고, 가장 대표적은 경우는 20대에 병조판서에 올랐다가 직속 부하 유자광(柳子光)의 모함에 빠져 목숨을 잃은 태종의 외손자 남이(南怡)를 들 수있다.
중종 초기 출신이 흐렸던 노영손(盧永孫)이 대사성 이과(李顆)가 논공행상에 불만, 자주 권부를 원망하는 말을 늘어 놓자, 이를 역모로 꾸며 고변한 끝에, 정난(靖難)공신 1등에 책록되고 품계가 정2품 당상관에 올라 임금의 총애를 받았다. 
그러나 노영손은「성격」이「인격」에 못미쳐 부귀영화와 교만에 빠져 패망했다. 한데 그의 출세를 계기로 시정에는「고변깜」을 찾아 눈을 희번덕거리는 무리들이 우글거렸다. 
중종8년(1513) 역모를 꾀한 죄로 처형 당한 박영문(朴永文)은, 중종반정때 군사를 동원, 일을 성공시켜 정국(靖國)공신 1등에 책록 된 인물로, 관직이 오위도총부도총관·공조판서에 이르렀었다. 
그러나 그는 무인 출신으로 문신들의 괄시를 받아 파직 당하니 불만이 컸다. 결국 같은 동지로 병조판서 자리에서 파직된 신윤무(辛允武)를 찾아 함부로 속에 담긴 말을 했다가, 의정부 노비 정막개(鄭莫介)에게 들켜 고변 당하고 말았다. 
이리하여 박영문과 신윤무는 극형으로 처형되고, 그의 아들들은 모두 목졸려 죽었다. 박영문의 집과 재물은 모두 정막개 차지가 됐고, 중종은 그에게 오위(五衛)의 정3품 상호군(上護軍) 제수와 함께 은띠와 의장(儀章), 안마(鞍馬)를 내려 주었으니, 정막개는「고변」한마디로 하루아침에 부엌데기 안방마님 된 꼴로기고 만장했다.
유세창(柳世昌)이라는 미련한 자가 있었다. 그는 자나 깨나 출세를 위한 「고변」을 모색하다가, 어리석게도 천인공노 할 만행을 저질러 만고의 비난을 샀다.
그는 동네 10대의 어린 아이들을 여럿 모아 며칠간 장난을 치고 놀더니, 이름을 모두 적고는 벼를 모아 운용하는 계(契)를 만들자며, 어느날 아이들을 모조리 집으로 데리고 갔다. 
얘들에게 술을 먹이고 놀이를 펼치더니, 이윽고 술취한 아동들을 꾀어 내기를 하자했다. 
정신이 혼미한 아이들을 우격다짐으로 꼬드겨 내기 도박을 한 끝에, 자기가 이겼다며 아이들 윗도리를 모조리 빼앗고 말했다.
 “내일 술과 쌀을 가지고 와서 옷을 찾아가라!”
옷을 빼앗긴 아이들을 돌려 보낸 유세창은, 밤을 새워 얘들 이름과 「모역(謀逆)결의」의 글을 써 옷들을 뜯어 넣고 꿰맸다. 
이튿날 약속대로 술과 쌀을 가지고 온 아이들 모두에게 옷을 나눠 주고, 그날로 바로 고변, 「얘들의 역모」가 있다는 어처구니 없는 희극을 벌였다. 
까닭 모르게 대궐 뜰에 잡혀온 아이들을 아무리 닥달해도 얘들은 무슨 영문인지 몰라 쩔쩔 매기만 했다.
마침내 형리들이 힘이 빠져 고문을 멈추자 유세창이 독사 이빨 사이 혀처럼 날름거렸다. 
“옷 속에 꿰맨 데를 뜯어 보면 알 것입니다!”
간밤에 맡겼다가 이제 막 술과 쌀을 주고 되돌려 받은 옷을 그대로 입고 잡혀온 아이들의 옷 속에는, 유세창이 쓴「반역 도모의 글」이 속속 나왔고, 어리 둥절한 아이들은 어떻게 변명할 방도를 찾지 못했다.
모진 매질과 혹독한 고문에 정신을 잃은 아이들은, 추관이 지껄이는 추달에 그냥 “예! 예!”를 내 뱉고 말았다. 그들은 숨이 붙어 풀려 나가더라도 이미 죽음의 문턱에 다다른 찢겨진 몸들이 되고 말았다.
역사는 이날의 일을 이렇게 기록하였다. 
『자백을 받아 수십명이 처형 당하고 매 맞아 죽은 자가 심히 많았는데, 그들 수십명은 겨우 나이 15, 6세 로서 서캐(이의 알)가 머리털 속에 가득한 소년들로, 유세창의 꾀임에 빠져 죽음을 당하니 듣는 자가 원통히 여겼다』그나마 정의가 조금은 살아있어 유세창은 역인(逆人)은 기록 되고 포상을 받은 흔적은 없으나, 영문 모르고 염라대왕 앞에 떼를지어 끌려간 얘들의 원한은 어떻게 풀었을까 실로 안타깝다.  

정 연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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