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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왕조 뒷 이야기

<조선왕조 뒷 이야기> 89

by 까망잉크 2018. 10. 22.

<조선왕조 뒷 이야기> 89


적출이나 서얼을 따지지 않았다면 중종의 가장 큰 아들은 복성군(福城君) 이미(李嵋)였다. 그는 중종이 세자로 삼은 장경왕후 윤씨 소생 이호(李岵-인종)보다 훨씬 나이가 많은 형이었다.


「권세와 이익과 사치와 화려함을 멀리하려는 사람을 깨끗하다고 하나, 이를 가까이 하면서도 물들지 않는 사람을 더욱 깨끗하다고 한다. 잔재주와 술수와 권모, 교묘함은 이를 모르는 사람은 높다고 하나, 이를 알고도 쓰지 않는 사람을 더욱 높다고 한다」<채근담>에 나오는 말이다. 


복성군은 왕이 총애하는 똑똑한 첫 왕자였으나, 그 어미의 교만 때문에 그만 어린 나이에 명줄을 끊어야했던 복 없는 왕자였다.


복성군의 어미 경빈(敬嬪)박씨는 경상도 상주 사람으로, 그녀의 아버지 박수림은 본래 양반나부랭이였으나 가세가 기울어 말단 무관직에 몸을 담아 연명하였다. 그런 가운데 연산군이 팔도에 채홍사라는 사냥개를 풀어 미색들을 물어 들이는데, 마침 얼굴이 절색이던 박수림의 딸이 걸려 곧 물려가 연산군의 먹이가 될뻔했다. 


운이 좋았다고나 할까 그만 연산군이 쫓겨나니, 위기 직전의 박수림딸은 살아 세상에 그 미색이 알려졌다.


새 임금 중종은 소문을 듣고 곧 박수림의 딸을 궁중에 불러 「숙의(淑儀)」라는 직위를 내려 첩실로 삼았다.


「숙의」는 궁중 내명부의 종2품 직위였으니, 박씨는 몸둥아리 하나로 정승 판서들과 맞장을 뜰 수 있는 높은 자리에 오른 셈이었다. 거기다가 박씨가 발빠르게 중종의 첫 아들 복성군을 생산하자 바로 정1품「빈(嬪)」으로 승격시켜, 「경빈」으로 칭호를 내리니, 그의 기세는 하늘을 찌를 듯했다.



중종은 왕비 말고도 모두 아홉 여인을 후궁으로 거느렸는데, 그 중에 경빈 박씨가 가장 으뜸이었다. 중종은 씨앗을 먼저 안겨준 박씨를 몹시 총애하자 그녀는 갑자기 태도가 달라졌다. 교만했고 분수 넘치는 언행을 일삼았다. 뇌물 먹기를 즐기니 청탁으로 한가닥 팔자를 고쳐 보려는 벼슬아치들이 문 앞에 줄을 이었다. 뿐만 아니라, 중종이 후궁들 가운데 가문이 좋아 왕비로 간택됐던 장경(章敬)왕후 윤씨가 왕자를 낳고 곧 세상을 뜨자 그 자리를 넘보는 과욕을 부리기까지했다. 


그러나 그녀의 궁궐 진입 경위와 보잘 것없는 친정 가품(家品)이 그의 꿈을 뭉갰다. 그런 가운데 그녀의 친정 애비 박수림과 두 오라비 박인형·인정이 모두 벼슬을 얻어 걸쳐 제 세상을 만난 듯 권세를 부리니, 그들 짓거리들이 경빈 박씨의 앞길을 더욱 어둡게 했고. 왕비자리는 결국 다른 후궁 윤 씨(문정왕후) 차지가 되고 말았다.


언감생심(焉敢生心), 그녀는 자신이 왕비가 되고 자기가 배아파 낳은 왕자가 세자가 되어 다음 왕위에 오르면 당신은 대비 자리에 앉아, 천하를 한번 휘어 잡아 볼까 하는 어마 어마한 꿈을 품기도 했었다.


타고난 운명을 바꾸는 방법은 따로있다. 먼저 뜻을 세웠으면 지난 날의 과오를 끊임 없이 반성, 고쳐 노력하며, 적선(積善)으로 민심을 끌고, 겸양(謙讓)으로 자신을 낮춰 기도(祈禱)로 마음을 다스려야한다. 


오직 미색으로 출세한 경빈 박씨의 처신으로는 도저히 운명을 바꿀 수없었다. 오히려 이미 패망의 길로 접어 들고 있었던 것이다. 


중종에게는 장녀 효혜(孝惠)공주가 있어, 권신 김안로(金安老)의 아들 김희(金禧)를 사위 삼으니, 김희는 경빈 박씨가 눈에 박힌 모래알처럼 여기는 세자(인종)와 친 남매간이었다.


권력 세계에는 언제나 물고 뜯기는 처절한 싸움이 있기 마련이다. 김희의 아버지 이조판서 김안로가 기묘사화의 원흉이며 경빈 박씨와 가까운 심정(沈貞)의 모함을 받아 귀양을 갔다. 이에 권력에서 밀려난 김안로는 절치부심(切齒腐心) 아들 김희를 시켜 이른바 「작서(灼鼠)의 변」을 일으키니 궁중은 발칵 뒤집혀 버렸다. 


중종22년(1527)에 일어난 동궁(인종)저주 사건이니, 기막힌 네거티브였다. 세자가 해생(亥生-돼지띠)이라 그가 거처하는 세자궁의 해(亥)자 방향 은행나무에, 세자의 생일인 2월 29일을 기해, 네 다리와 꼬리가 잘리고 입·눈·귀를 불로 지진 흉측한 꼴의 쥐를 매달고, 대롱거리는 쥐를 저주하는 글을 목판에 새겨 걸었다. 


해(亥)는 돼지를 뜻하고 쥐는 돼지를 닮은 데다 세자가 돼지 띠니, 말깨나 하는 조정 대신들은 세자가 일찍 말라 버리기를 바라는 일당들의 소행으로 단정해 버렸다. 


우의정 심정이 발 벗고 나서서 범인을 잡으려했으나, 화살은 대 놓고 세자를 미워하던 경빈 박씨에게 집중되었고, 박씨 모자를 변호해 주는 간 큰 입은 없었다. 


결국 경빈과 복성군이 범인으로 몰려 사약을 받아 죽고, 그들을 감싸던 심정도 황천길을 동행했다. 


훨씬 뒤에 김희의 범행으로 밝혀졌으나, 이미 저승식구가 돼 버린 복성군모자를 데리고 올 수는 없었다. 따지고 보면 경빈의 교만이 그녀의 몰락을 재촉한 셈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정 연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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