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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왕조 뒷 이야기

<조선왕조 뒷 이야기> 102

by 까망잉크 2018. 11. 26.

 

<조선왕조 뒷 이야기> 102

(주)하동신문

『꽃엔 향기가 있고 사람에겐 품격이 있다.』『한 인간의 개성은 꽃의 향기와 같다.』 새겨 둘 말이다. 사람에 따라 한 순간의 행동에 그 사람의 품격이 들어나 운명이 달라지는 경우가 더러있다.
제왕의 자리는 감히 넘 볼 수없는 팔자를 타고 났으나, 유별난 인품으로 옥좌를 물려 받아, 무려 40년 왕권을 누린 선조(宣祖)는, 조선조 최초의 측실 계통 임금이었다.  
외아들 순회세자를 잃은 명종은 후사(後嗣) 문제로 늘 마음이 흐렸다.
정비(正妃) 인순왕후는 떠나 버린 순회세자 이후 더는 생산을 하질 못했고, 후궁이 여섯이나 됐으나 아무도 아들을 낳지 못했다.
친 형제 친 조카가 없었던 명종에게는, 아버지 중종이 거느렸던 후궁 아홉에게서 난왕자 복성·해안·금원·영양·덕양·봉성·덕흥군(德興君) 등 일곱명의 서(庶)형제가 있었으나, 문정왕후 그늘에서 말라 버리거나 모두가 시들 시들 힘이 없었다.
다만 일곱째 덕흥군만은 비록 일찍 세상을 등지기는 해도 볼만한 아들들을 둬 명종이 부러워했다.
세자를 잃은 명종은 서형제들에게서 난 조카들을 자주 궁중으로 불러 글과 행실을 가르쳤는데, 주로 덕흥군의 아들 하원(河原)·하능(河陵)·하성군(河城君) 형제와 또 다른 조카 풍산군(豊山君) 등이었다.
하루는 명종이 조카들에게 「글씨를 보겠다.」 며 각자 몇자씩 글을 써 보라했다.
왕손들은 저마다 짧은 시를 쓰거나 연구(聯句)를 써 올렸는데 분위기에 맞지 않았다. 그런데 나이 가장 어린 하성군은 『忠孝本無二致』 라는 여섯자를 써 올렸다.
풀이하면 『충성과 효도는 본래 둘이 아니다』 라는 철학이 담긴 의미 깊은 말이었다.
명종은 하성군을 기특한 인물로 여겨 이런 말로 푸념했다.
『저런 아들을 둔 덕흥군은 복이 많다.』 심지어 『참한 인물이 났기에 내 아들이 죽어야했구나!』 꼽씻어 보면, 「진실로 왕이 될 인물은 세자가 아니었고 바로 하성군이었구나!」 라는 뜻이된다.
하루는 명종이 조카들을 불러, 왕이 집무를 볼 때 쓰는 익선관(翼善冠)을 벗어 번갈아 머리에 써 보라며 말했다.
“너희들 머리가 누가 크고 작은지 알아 보련다”
모두들 「좋아라」 며 익선관을 차례로 받아 썼는데, 나이 제일 어린 하성군은 익선관을 두손으로 공손히 받들어 명종 앞에 고이 놓고 머리를 조아려 말했다.
“이것이 어찌 보통 사람이 쓰는 것이 오리까!”
이후 명종은 당대의 학자 한윤명(韓胤明)·정지연(鄭芝衍)으로 하여금 하성군을 특별히 가르치도록 일렀다.
왕은 「하성군 세자 책봉」을 공식화 하지 않았을 뿐 이미 마음은 궂힌 것이었다.
명종22년(1567) 6월 27일, 명종의 병세가 위중, 영의정 이준경(李浚慶), 우의정 심통원(沈通源) 등이 급히 침전으로 들어갔는데, 이미 말문을 닫은 뒤였다.
이준경이 당황하여, 「대계(大計)를 정하셔야합니다!」 하고 외쳤더니, 왕은 말은 못하고 손으로 안쪽 병풍을 가르킬 뿐이었다.
이준경은「왕후에게 물으라!」는 뜻으로 알아 채, 인순왕후에게「내전께서 들으신 바가 있으므로 지금 전하께서 병풍을 가르켰는가 하옵니다!」며, 후사로 누굴 정했었는지를 서둘러 밝혀야한다고 졸랐다.
이준경을 비롯한 대신들은 이미 「하성군 후사」 가 기정 사실임을 알고 있었으나, 대통은자격있는 실권자 입을 통해 밝혀 져야했다.
“그전에 위독하실 때 덕흥군의 셋째 아들로 정하시었오!”
인순왕후의 무거운 대답이었다.
덕흥군은 이미 이런 일이 있기 훨씬 전인 1559년 30세 나이로 세상을 떴으나 조용하던 그의 가문은, 품격있는 아들 하나 잘 둔 덕에 확 바뀌었다. 오이 넝쿨에 참외가 달렸다고나 할까. 호박이 넝쿨째 굴러 들어 들어왔다고나 할까.
덕흥군 셋째 아들 이균(李鈞), 뒤에 이연(李연)으로 고쳤다.
어머니는 하동부원군 정인지(鄭麟趾)의 손자 정세호(鄭世虎)의 딸, 보위에 오른 선조는 아버지를 덕흥대원군으로 추존, 어머니 정씨는 하동부대부인으로 승품(陞品)됐다.
명종7년(1552) 11월 11일 태어나 열 여섯 나이로 왕이 된 선조는, 나이 때문에 명종비 인순왕후가 수렴청정을 하다가, 비록 어리지만 총명하고 사리판단이 발라 친정(親政)해도 아무 손색이 없다며 편전을 통째로 넘겨 주니, 선조는 열 일곱 살 제왕으로 천하를 얻었다. 선조는 학문을 좋아하고 성리학을 열심히 익혔다. 공신과 왕실 친인척을 멀리하고 선비를 대거 등용, 조정에 새 바람을 일으켰다.
한데 융성한 사림(士林)들 사이에 붕당이 생기는 뒷탈이 있었고, 40년 7개월이란 오랜 집권 중에 임진왜란 같은 국난을 겪기도했다. 1608년 2월 1일 57세 일기로 숨지니, 오늘날의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에 마련된 능호 목릉(穆陵)이 곧 그의 유택이다.
정  연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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