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 뒷 이야기> 100(주)하동신문
『세상에 「높은 사람」 되기는 쉬워도 「좋은 사람」 되기는 어렵다』
영조 때 성리학자 이재(李縡)의 어머니가 아들에게 일러준 천하의 명언이다.
그런데 명종 때 「좋은 사람」 이라는 평판에, 벼슬도 영의정까지 올랐던 상진(尙震)이, 곧 두 가지를 누린 복상(福相)이 아닌가 싶다.
상진의 본관은 목천(木川), 큰 부자였던 그의 증조부 이조판서 상영부(尙英孚)가, 어느날 남에게 꿔준 곡식과 돈 문서를 모조리 불태우면서, 「내 후대에 반드시 귀한 사람이 나리라!」 했다.
찰방 벼슬을 살던 상진의 아버지 상보(尙甫)는, 늦게 성종24년(1493) 상진을 낳아, 아들이 다섯 살 때 애 어머니가, 여덟살 때 자신마져 세상을 등지니, 어린 상진은 매부 성몽정(成夢井)이 거두었다.
소년시절 놀기만하던 상진은, 열다섯살 때 동년배들 따돌림에 자극 받아 공부에 매진, 26세 때 문과에 올라 사관(史官)이 됐다.
인품이 후덕하고 부지런하여 중종때 청환(淸宦)을 두루 거친 그는, 40세에 대사간에 오르는 등, 벼슬길이 매우 순탄, 쉽게 병조판서가 됐는데, 중종이 승하하고 인종이 등극하자 득세한 윤임(尹任) 세력이, 윤원형 형제가 상진을 키웠다는 오해를 품고, 경상도관찰사로 좌천 시켜 버렸다.
인종이 가고 명종이 즉위하자, 권력을 잡은 문정왕후는 무던한 상진을 우의정에 앉혀 정권의 얼굴로 삼으니, 그는 드센 치맛바람 속에서 「속앓는 얼굴 정승」 으로, 윤원형 등 「권력 실세」 와 자주 부딪혀야했다.
그는 정치에 환멸을 느낀 대사성 이황(李滉)이 병을 핑게로 낙향해 버리자, 불러 등용하기를 주청했고, 불손하기 짝이 없는 <단성소>를 올린 조식(曺植)을 문정왕후가 잡아 올려 문초하려하자, 이를 극구 말려 그러지 못하게했다.
상진의 운명은 그의 관후한 인품과 덕망, 그리고 불가항력으로 막지 못한 잘못된 정사에 대하여는, 밤중에 뜰에 엎드려 하늘을 우러러 회개하는 몸가짐에서 달라졌다.
어느날 그의 집에 든 도둑을 하인들이 잡아 꿇렸다. 상진은 측은한 눈으로 도둑을 내려다 보고 부드러운 말로 탄식했다.
“오죽 주렸으며 남의 물건을 훔치려했겠느냐! 네가 이후라도 춥고 배가 고프면 내게 와서 고할 일이지 남의 것을 훔치려하지 마라!”
하고 욕심 낸 물건에 다른 것을 더 보태 주어 도둑을 내 보냈다.
상진은 사람들이 즐기는 애완용 새 짐승은 보는 대로 풀어 주라했다.
“자유롭게 살고 싶은 것은 사람이나 동물이나 다 같으리라!”
홍계관(洪繼寬)이란 점술인이 상진의 일생을 점쳤는데, 수명은 56세 이쪽 저쪽이고 벼슬은 정승에 오를 것이라했다.
상진은 좌의정에 올라 세상을 떠날 때가 됐다 싶은데 죽을 기미가 느껴지질 않았다. 그는 홍계관을 불러「점괘가 왜 그 모양이냐?」고 따졌다.
홍계관도 놀라 잠시 머뭇거리더니 「필경 대감께서 사람 목숨을 살려 주신 일이 있습니다!」 하고 매우 기특한 일이라는 표정을 지었다. 상진도 집히는 데가 있어 옛 일을 털어 놨다.
“내가 수찬(修撰) 벼슬 시절, 퇴근길에 순금 술잔 한쌍을 싼 붉은 보자기를 주웠지, 잊은 자를 찾고자 대문에 「아무날 붉은 보자기에 싼 물건을 잊은 자는 내게 오라」 라고 써 붙였더니, 이튿날 대전 수라간 별감이란 자가 찾아와 「자질(子姪) 혼인이 있어 대궐 주방 금잔을 몰래 빌어 내 왔다가 그만 잃어 버렸습니다.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하기에, 금잔을 내 주고 입을 다물게하여 그 별감을 살려 준 일이있었지!”
홍계관은 「그 일로 대감의 수명이 길어졌습니다」 라고 단정하였다.
그래 그런지 상진은 영의정으로 승차하고 점괘보다 15년을 더 살았다.
상진은 평생토록 남의 단점을 입에 담지 않았다. 한쪽 다리가 짧아 걸음이 불편한 사람을 절름발이라고 놀리면, 상진은 손을 내 저으며「한쪽 다리가 길어서 그렇다」 고 고쳐 말했다.
한때 문정왕후는 신료들의 인기를 독차지하는 상진을 시샘하여, 몰래 사람을 시켜 뒷 조사로 그의 흠을 찾으라했다.
그런 어느날 저녁 무렵 염탐꾼은 길손인 체 꾸며 상진의 거처를 찾았다. 곧 쓰러질듯한 오두막집 좁은 마당가에 하인이 맷돌에 통밀을 갈고 있었다.
염탐꾼은 능청을 떨며 「그게 뭐냐?」 고 묻자, 하인은 「저녁끼니로 죽을 쑤려는 참이라」 했다. 염탐꾼은 그대로 복명하였다.
사실을 전해 들은 임금 명종은 감동한 나머지 저녁 잠자리에서 왕비와 마주 앉아 눈물을 흘렸다.
명종19년(1564) 윤2월 24일 상진은 72세로 숨을 모았다. 부음을 들은 명종은 『悼老德大臣-덕있는 노대신을 애도함』 이란 제목의 시를 짓고, 「상진이 몸져 누웠다는 보고가 없었다」 며, 문병하지 못한 아쉬움에서 도승지와 관련 승지를 모두 파직 시켜 버렸다.
정 연 가
'조선 왕조 뒷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조선왕조 뒷 이야기> 102 (0) | 2018.11.26 |
---|---|
<조선왕조 뒷 이야기> 101 죄와 벌 (0) | 2018.11.22 |
<조선왕조 뒷 이야기> 99 (0) | 2018.11.15 |
<조선왕조 뒷 이야기> 98 (0) | 2018.11.11 |
<조선왕조 뒷 이야기> 97 (0) | 2018.11.04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