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 뒷 이야기> 114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왜국 하급 무사에서 주군에 대한 별난 충성심으로 출세, 16세기 동양 3국을 뒤 흔든 걸물로 이름을 떨쳤다.
그는 젊어서 기노시타 도치키로(木下藤吉郞)이라했다가, 다조대신(羽柴秀吉) 간파쿠(關白)가 되어 토요토미라는 성을 썼다.
정유재란이 끝난 그해 1598년 초겨울, 63살 나이로 죽은 그의 죽음에대하여 이런 기록이 전한다.
일찍이 왜군 침략으로 빚어진 「동래성 전투」에서 동래부사 송상현(宋象賢)과 함께 순절한 양조한(梁朝漢)이란 사람이 있었는데, 그의 손자 양부하(梁敷河)가 12세 어린 나이로 왜군에게 사로 잡혀 대마도로 끌려 갔다.
포로로 잡혀 간 양부하는 나무 판대기에 『조선의 양가(良家) 자제로 관백(關白)에게 헌신하겠다』 는 글을 새겨 세웠더니, 대마도주가 여러 경로를 통해 알려 풍신수길이 어린 양부하를 알게하였다.
풍신수길이 양부하를 불러 살펴 보고는
“조선 아이도 일본 아이와 같구나!” 하더니, 그는 조선말에 능통한 통역 하나를 양부하 스승으로 삼아, 양부하에게 조속히 일본말을 통달하게 가르치라했다.
양부하는 석달 동안 부지런히 익혀 일본말을 자유 자재로 구사하니, 마음에 흡족했던 수길은 양부하를 항상 좌우에 가까이 있게하고 조선 말에 능한 비서로 삼았다.
수길은 언제나 삼층 병풍을 뒤에 치고 높이가 한자 넘는 자리에, 머리칼을 틀어 뭉쳐 얹고 다리를 뻗어 앉았는데, 왼편에는 총포와 검을 두고 바른 편에는 활과 살을 두었으며, 머리 위에는 창 등속을 매달아 보신(保身) 단단히 했다.
그가 벌인 왜란으로 세상이 시끄러웠는데도 수길은 하는 일 없이 매일 노닥거리며, 시중드는 신하 다섯명과 옛 이야기로 시간을 보내며 가끔은 손뼉까지 치고 즐거워했다.
수길은 다섯 계집을 거느렸으나 자식이 없었다. 왜란을 일으킨 그해 겨우 아들 하나를 얻었는데, 이름이 수뢰(秀賴)였다.
왜란 때 포로로 잡혀 일본에서 오래 살았던 강항(姜沆)은 그가 쓴 <간양록(看羊錄)>에, 「수길의 아들 수뢰는 풍신수길의 다섯 계집 가운데 하나가 수길의 측근 신하와 간통하여 얻은 자식」이라 기록했다.
1596년 가을, 명나라 사신 심유경(沈惟敬)이 왜와 화친을 교섭하려고 일본으로 건너 갔다. 그러나 일본은 심유경을 객관에 가둬 엄중히 지키기만 할 뿐 대화를 하지 않으려했다.
이때 양부하가 풍신수길에게 심유경을 한번 만나 보게 꼬드겼다.
이리하여 심수경은 어렵게 수길을 만났는데, 짐짓 매우 피곤한 기색을 보이며 주머니에서 환약(丸藥)을 한개 꺼내 먹었다.
다음 두 번째 만났을 때도 역시 환약을 꺼내 먹었더니, 수길이 괴이하게 여겨 까닭을 물었다.
“바다 만리를 건너 오느라 습기에 몸을 상해 병이 되었기에 이 약을 먹었더니 기운이 넘치고 몸이 가볍게 회복 되오!”
심수경의 이 말을 들은 수길은, “나도 앞서 섬에 갔다가 돌아 왔더니 기운이 쇠한 듯한데 한 알 먹을 수있겠오?”하며 약을 청했다. 심유경은 기꺼이 약을 주니 양부하가 받아 수길에게 전했다.
수길은 품속에서 버드나무 가지로 만든 나무 칼로 약을 반으로 잘라 반쪽을 심수경에게 주며, “함께 맛보고 싶소”했다. 혹시「독약이 아닌가」 의심해서였다.
심수경은 환약 반쪽을 삼키고 연신 기분이 좋아진 듯 표정을 지으니, 수길은 비로소 약을 삼키고 물을 마시는 것이었다.
이로부터 며칠간 수길은 심유경에게서 환약을 한 알씩 얻어 먹고 매우 흡족한 표정을 짓기는 했으나, 기실(其實) 그 환약은 천천히 몸을 망가 뜨리는 독약이었다.
심유경은 약을 먹은 뒤 언제나 독을 푸는 다른 약을 복용, 몸을 지켰으나 수길은 감쪽 같이 속아 몸이 점점 기름끼가 빠져갔다. 이미 심유경은 명나라로 돌아 갔고 수길은 말라 비틀어져 가는 몸둥이를 의원에게 맡겼으나 「회복 불능」 이란 진단 뿐이었다.
수길은 계집들에게 쑥 뜸질을 시키는 등 법석을 떨다가 체념한 나머지 갑자기 몸을 모로 누이며 허무한 웃음을 띄고 첩들에게 말했다.
“내가 일어 나질 못 할 것같다! 내가 죽거든 밖에 알리지 말고 배를 갈라 창자를 들어 내고 속을 씻은 다음 말꼬리로 꿰매서 시체를 술독에 담가 보존하라!”
이리하여 숨이 끊어진 풍신수길의 시신은 속이 빈 채 술독에 담겨졌다. 몇 달이 지나니 냄새가 심하게 밖으로 풍겨 결국 세상에 밝혀지고 말았다.
양부하는 수길이 병든 이후 부터 수길을 보살피지 못하고 문지키는 자에게 사정을 들었다. 이때 수길의 아들 수뢰는 일곱 살 이었고, 전쟁이 끝났뒤 양부하는 39세 때 고국으로 돌아 왔다
정 연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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