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 뒷 이야기> 113
生也一片浮雲起
삶이란 한 조각 구름이 일어남이요
死也一片浮雲滅
죽음은 한 조각 구름이 흩어짐이라
浮雲自體本無實
뜬 구름은 본래 실체가 없는 것이니
生死去來亦如然
살고 죽음 오고 감이 또한 구름일러라
해남 대흥사 입구 돌에 새겨진「서산대사 시(詩)」다. 탐욕에 젖어 부질없는 출세를 바래 발버둥치는 중생들에게 던진 그의 달관적 인생관이 아닌가 싶다.
임진란 승병장 서산대사(西山大師)는 법명이 휴정(休靜), 속명은 최여신(崔汝信), 어릴 때 이름은 운학(雲鶴), 본관은 완산(完山), 널리 알려진「서산대사」는 그의 호였다.
대사는 아버지 최세창(崔世昌)이 본래 서울 사람이었는데, 장인 김우(金禹)가 무오사화에 걸려 평안도 안주(安州)로 귀양 가는데 동행했다가 거기서 늦게 얻은 외아들로 태어났다.
대사는 아홉 살 때 먼저 어머니를 잃고 이듬해 아버지마져 세상을 떠나버린 천애고아였다.
그는 안주목사 이사증(李思曾)의 보살핌으로 서울에서 공부를하였으나 같은 또래들 틈에 끼질 못한 「왕따」 였다.
생원 시험에 낙방, 방황하다가 친구 둘과 하동 지리산에 들어와 화개 범왕 신흥사에 몸을 의탁했다. 그는 두 학동과 헤어지면서
“나는 몸부칠 곳이 없어 여기서 불문(佛門)에 들고자한다”는 말을 남기고 옷소매로 눈물을 훔치며 돌아셨다.
그때 나이 15세. 이리하여 신흥사 주지 영관(靈觀)대사 밑에서 열심히 불법을 익혔다. 3년간 <화엄경> 등 불교 교리를 탐구하고 드디어 머리를 깎았다. 그날 대사는 이런 시를 지어 울적한 마음을 달랬다.
忽聞杜宇啼牆外
담밖에 슬피우는 두견새 소리
滿眼春山盡故鄕
눈에 가득 봄산이 다 고향 같도다
吸水歸來忽廻首
물 길어 오다 문득 돌아 보니
靑山無數白雲中
흰구름 사이에 청산이 떠 있어라
「휴정」 으로 법명을 받은 대사는 그날 밤 서럽게 울었다. 모처럼 낳은 아들에게 극진했던 어머니 모습이 그리웠고, 어미 잃은 아들을 측은하게 여기시던 아버지의 눈빛이 떠 올라 잠을 설쳤다.
이리하여 하동을 고향같이 여겨 살기 13년, 성장한 대사는 화개를 떠나 오대산·금강산 등지를 찾아 수도한 뒤, 승과에 합격, 왕실 기도처 봉은사 주지를 맡기도하였는데, 화개동천이 그리워 선교양종판사(禪敎兩宗判事)라는 화려한 고위 직위를 버리고 다시 화개로 내려와 내은적암을 손질, 청허당이라 이름지어 수도처로 삼아 정진하였다.
서기1561년 신흥사 승려들이 범왕 삼거리 신흥동 입구 개울을 가로 지르는 돌다리를 놓고 그 위에 곱게 단청한 정자를 지어 「능파각(凌波閣)」 이라했다. 이때 대사는 「신흥사 홍류교 능파각 시」 를 지어 그의 심경을 세상에 토로, 그의 뛰어난 문재를 고시했다.
畵閣飛雲橋下水
다리아래 물 흐르고 구름은 누각에 날리는데
山僧每日踐長虹
산승은 날마다 긴 무지개 밟고 섰네
幾多塵世飜新局
삶이 어지럽기 그 몇 번이던가
何代閑民作老翁
한가로운 백성 어느새 늙은이 되었네
春暮山間花雨亂
봄늦은 골짜기에 꽃비 휘날릴제
月明天上玉樓間
달 밝은 하늘 아래 다락은 비어있오
澗琴松瑟無終曲
물소리 솔바람은 천년의 노래라
萬古乾坤一笑中
만고의 누리에서 한바탕 웃어보네.
위 시는 불교를 질시하던 유생들도 즐겨 읊었던 명시로 평가됐다. 그런데 대사는 산청 조식(曺植)문하 제자들 핍박을 견디질 못해 그만 지리산을 뜨고 말았다. 그때 그가 남긴 것으로 여겨지는 이런 시가있다.
可笑世間愛 세상 탐욕 가소롭다
永鎖互解時 때가 되어 서로 오해 풀리니
恩多幡번作恨 은혜가 오히려 한이 되고
歡極却成悲 즐거움은 가고 슬퍼만지네
하동을 떠난 대사는 묘향산에 들어가 그가 불심을 길렀던 하동을 다시는 찾지 않더니, 10년이 지난 임진란 때 선조의 부름을 받아 승병장으로 나라를 구하는 선봉이 됐다.
정 연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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