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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왕조 뒷 이야기

<조선왕조 뒷 이야기> 115

by 까망잉크 2019. 1. 3.

<조선왕조 뒷 이야기> 115

(주)하동신문

최근 미국의 어느 인터넷 여론 조사 기관이 미국인들을 상대로 「한국과 일본 중 어느 나라가 좋으냐?」 고 물었더니, 65.6%가 일본을, 34.4%가 한국을 택했다는 결과가 나왔다.
그런데 기분 언짢은 것은 한국이 좋다고 답한 미국인들은 오로지 「음식」 때문에 그렇다했고, 일본이 좋다고 답한 사람들은 「사람」을 꼽았다는 것이었다.
위 내용은 박승희 중앙일보 워싱턴총국장이 갈파한 글이다. 미국인들은 거의 배나 가까이 「사람들 됨됨이」 때문에 한국보다 일본을 좋아한다하니 입맛이 쓰다.
일본인들이 친절하고 믿음이 가고 나라 사랑하는 마음이 유별나기 때문일까. 국제관계에서도 정치적으로 미국은 언제나 일본편이다. 미국의 대중국정책에 일본의 거대한 경제력을 빌리지 않을 수없기 때문일 것이다.
미국이 중국을 상대하는데 드는 방위비 일부를 일본이 부담하겠다고 나서니, 점점 중국과 가까워지려는 한국보다 일본이 훨씬 이쁘게 보이지 않겠는가.
옛날 우리 조상들은 일본을 얕잡아 「왜국(倭國)」이라 불렀고, 조선조 임진년 일본군 침입 전란을 「임진왜란」이라 기록했다. 「왜」라는 글자는 「보기 흉하다」는 뜻이 담겨있다.
이는 옛 삼한시대부터 한반도 해변을 자주 시끄럽게 굴던 일본인들이 너무 보기 흉해 붙혀진 호칭이 아닌가 싶기도하다.
명치유신으로 일본이 개화되기 이전만해도 일본인은 우리 눈엔 「왜인」의 틀을 벗어나기 어려웠다.
임진왜란때 일본인들의 가증스런 행태를 보여주는 사건이 있어 되짚어 본다. 1592년 4월 13일. 왜군 15만 8천여 대군이 부산에 상륙, 파죽지세로 북진하여 5월 3일 수도 한양을 점령해 버렸다.  이른바 임진왜란이다.
왜군 입장에서는 한번도 싸움다운 걸림돌 없이 그냥 걸어서 20일 만에 조선의 심장부를 차지해 버린 셈이었다.
9월 왜군대장 흑전장정(黑田長政)은 기고만장 황해도를 휩쓸고 서해 바닷가 연안성(延安城)을 공격하는데, 비로소 전투다운 전투가 벌어진 셈이었다.
이때 연안성 방어 장수는 초토사 이정암(李廷암). 그는 문관으로 오늘날의 안전행정부 국장쯤 되는 이조참의였는데,  의병 자격으로 무관직인 초토사를 맡아 왜적과 맞섰다. 군복을 갖춘 이정암은 보통 장수가 아니었다.
나흘간 분전 끝에 결국 왜적은 성을 포기하고 퇴각했다. 반격을 개시한 조선 군사의 추격에 적은 화살 맞은 늑대떼 마냥 도망치기 바빴다.
역사는 『이정암 등 황해도 연안에서 왜군 대파』라고 기록했다.
한데 왜적은 허겁 지겁 도주하는 와중에 「훌륭한 지휘관을 존경한다」며 선물이랍시고 커다란 나무궤짝 하나를 보내 왔는데, 아주 진귀한 보물인양 「반드시 수장(首將)께서 손수 열어 보시라」는 전갈 까지 보탰다.
이정암은 보기드문 지장(智將)이었다.
그는 눈앞에서 서둘러 궤짝을 열려는 측근들을 제지하며 “적의 계모(計謀)를 헤아릴 수없으니 열지 말라!”했다. 이정암은 궤짝 안에는 분명히 자기의 기상을 꺾으려는 흉물이 들어 있거나 아니면 조선군사의 시신이 들어 있을 것이라는 짐작에서, 전투 현장에 보내진 적의 선물따위에 신경쓸 것없다는 태도였다.
그러자 한 막료가 곧 눈치를 채고 궤짝 한쪽에 구멍을 뚫어 안을 살폈다. 아니나 다를까, 속에는 희한한 물건이 살아 숨쉬고 있었다. 체구가 아주 왜소한 왜군이 움츠리고 있는게 아닌가. 이정암의 예상은 지극히 순수했었고, 왜적의 술수는 참으로 가증스러웠다.
급기야 긴 갈쿠리로 무장한 병사들이 빙 둘러싼 가운데 궤짝이 열리니, 날이 시퍼런 단검을 움켜진 자객이 눈을 부라리고 튀어나왔다. 원숭이 같은 왜귀(倭傀)는 집중된 가쿠리 공격에 죽어 가면서도 눈은 지켜보는 이정암의 목을 노려 보고있었다.
이정암의 본관은 경주. 여러 벼슬을 거쳐 연안 부사를 역임하며 선정을 베풀어 백성들의 존경을 받았다. 그는 왜란이 발발하자 이조참의로 선조가 평안도로 피난할 때 호종(扈從)대열에 늦게 참여, 그만 체직 당해 직위를 잃었다.
개성유수였던 아우 이정형(李廷馨)과 개성을 지키려다 중과부적으로 실패하고 황해도로 들어가 의병을 모집, 초토사가 되어 연안성에서 흑전장정과 결투를 벌였던 것이다. 치열한 전투 끝에 결국 승리를 거둬 나라를 건지는 단초를 만든 셈이 된 그의 전공은 임금을 눈물겹게했다. 그 전공으로 이정암은 황해도관찰사겸 순찰사에 올랐고, 이듬해 국방부차관격인 병조참판에 기용되어 군병권을 장악하기도했다.
뒤에 벌어진 정유재란때 이정암은 다시 해서초토사(海西招討使)가 되어 해주 수양산성을 지켜 명성을 날렸다. 1600년 이정암은 60세 나이로 숨을 거두었다.
그는 선무공신 2등에 책록되고 좌의정에 추증과 함께 충목공으로 시호까지 받았다. 왜적의 잔꾀도 이정암같은 지혜로운 인물은 어쩌질 못했다.
                                                     
정 연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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