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 뒷 이야기> 116
선조22년(1589), 황해감사 한준(韓準)이 안악군수 이축(李軸), 재령군수 박충간(朴忠侃), 신천군수 한응인(韓應寅) 등이 함께 올린 「정여립 반역 모의」 고변을 접수, 10월 2일 곧바로 장계를 올렸다. 모의가 들어난 것은, 같은 무리였던 안악 교생 조구(趙球)의 밀고 때문이었다.
화들짝 놀란 임금 선조는 3정승 6판서와 의금부 당상관들을 급히 소집하고, 숙직하는 상하 신료들을 모두 대기시켰다. 한 동안 잠잠하던 나라가 시끄럽게 된 것이었다.
정여립의 본관은 동래(東萊), 아버지 정희증(鄭希曾)은 종4품 첨정(僉正). 정여립은 정승 벼슬 많이 난 벌족 동래정문(鄭門)에서 태어났지만 그가 속한 대호군파(大護軍派)는 정여립과 9촌간인 우의정 정언신(鄭彦信)이 있을 뿐 큰 인물은 드물었다.
정여립의 아버지가 전라도 전주에 살면서 여립을 잉태할 때 고려 무신난 주역 정중부(鄭仲夫)가 꿈에 나타났고, 태어 날 때도 같은 꿈을 꾸니 정희증은 마음이 불편했다. 여립은 일곱살 때 새끼 까치를 잡아 주둥이부터 발끝까지 뼈마디를 부러뜨리고 살을 찢어 버린 일이 있었다. 아버지 희증이 버려진 까치 주검을 보고 “이게 누구 짓이냐?” 물었더니, 여종이 사실대로 대답했다.
노한 정희증은 아들 여립을 크게 꾸짖었다. 그날밤 여립은 여종의 방을 찾아갔더니 마침 여종 부모는 방아 찧으려 나갔고 종이 혼자 자고 있었다.
정여립은 칼로 자고있는 여종의 배를 사정 없이 갈라 죽여 버렸다. 여종의 부모들이 돌아와 딸의 꼴을 보고 발을 굴리면서 통곡하니, 이웃 사람들이 큰 구경이 난 듯 몰려 들었다.
어둠 속에 숨어 있던 정여립은 태연스레 나타나 “내가 한 짓이니 괴이하게 여기지 말라!”며, 조금도 기가 꺾이지 않은 태도였다. 이 꼴을 본 사람들은 “악(惡) 장군이 났다!”며 혀를 내둘렀다.
정여립이 15세쯤 되었을 때 아버지 정희증이 현감이 되었다. 여립은 아버지가 맡은 고을로 따라가서 고을 일을 막무가내 자기 마음대로 처결하니, 현감을 보필하는 아전들이 모두 여립의 말만 받들며 두려워했으나, 현감 정희증은 혀만 끌끌 찰 따름이었다.
전주 인근 금구(金溝) 처갓곳에 살면서 정여립은 선조2년(1570) 스물다섯 나이로 문과에 올랐다. 두뇌가 명석한 정여립은 늠름한 체격에 통솔력이 있었고, 특히 경사(經史)와 제자백가서(諸子百家書)에 통달하였다.
그는 본래 당파로 서인에 속해 율곡 이이와 성혼(成渾)의 각별한 가르침으로 쉽게 예조좌랑을 거쳐 홍문관수찬에 이르렀는데, 서인이 실각하고 동인이 집권하자 재빠르게 스승을 배반, 동인에 붙었다.
그러나 배신자는 설곳이 없어 그만 벼슬을 버리고 낙향, 글 읽기만 힘썼다.
정여립은 성격이 흉폭하여 여러 형제들과 의절했고 친인척들과 원수같이 지냈다. 그의 이웃에 양반 가문의 청상과부가 살았다.
정여립은 돈 많은 과부를 욕심낸 나머지, 그 과부가 집안에 강도를 키우고있다고 관청에 무고, 그 집 노비를 잡아 가두게하고 혼자있는 과부를 덮쳐 절의를 지키려는 여인을 무참히 강간, 마침내 첩으로 삼아 버렸다.
정여립은 고향 근처 여러 고을 폭력배들을 모아 대동계(大同契)라는 폭력 조직을 만들어 열심히 무술을 익히게했다.
그는 평소 이런 문자를 남겨 그의 사상을 의심 받았다.
천하공물설(天下公物說)-천하는 공물인데 어찌 주인이 따로 있으랴.
하사비군론(何事非君論)-누구든 섬김을 받으면 임금이 될 수있다.
한편 정여립은 예언서 <정감록비결(鄭鑑錄秘訣)>을 염두에 두고 이런 말을 퍼뜨려 민심을 현혹했다. 이른바 도참신앙(圖讖信仰)이었다.
『목자(木子)가 망하고 전읍(奠邑)이 흥한다』목자(木子)는 곧 이(李)의 파자(破字)라 「이씨가 망한다」 는 뜻이었고, 전읍(奠邑)은 정(鄭)의 파자라「정씨가 왕이 된다」는 뜻이었다.
정여립의 거처를 압수 수색,「제천문(祭天文)」 이라는 글을 찾아 냈는데, 그것은 임금 선조의 실덕(失德)을 조목 조목 열거, 조선 왕조가 운이 다하였음을 설파하고 천명이 조속이 이행되기를 바라는 기도문이었다고 전한다. 그는 「정씨조선」 을 꿈꾼 것이었다.
정여립의 작전계획은 겨울 한강 결빙을 이용, 황해도와 호남에서 반역군이 동시에 서울로 진입, 대장 신립(申砬)과 병조판서를 먼저 죽이고 병권을 장악한다는 것이었다.
모의가 탄로나 체포령이 내리자 정여립은 아들 옥남(玉男)과 함께 진안 죽도(竹島)에 숨었다가 포위망이 좁혀 오자 자살로 삶을 마감했다. 나이 44살. 아들 옥남은 고문 끝에 죽었고, 노모와 다른 자식들 모두 목숨을 잃었다.「정여립 모반사건」은 엄청난 후유증을 남겼다. 1000여 동인(東人) 세력이 숙청 당하니 이른바 기축옥사(己丑獄事)였고, 그의 출신지 호남이 반역향으로 낙인 찍혀 이로부터 호남인들 등용이 어렵게 되었다.
정 연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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