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환의시간여행] 이·벼룩 잡으려고 온몸 "DDT 목욕"… 맹독 물질인 줄 모르고 부엌까지 뿌려
"보건후생부에 고(告)함!"
1946년 10월 '영등포의 한 주민'이 자못 준엄한 어투로 보건 당국을 꾸짖는 글을 신문에 기고했다. 미 군정청 요원들이 전염병 예방을 위해 살충제 DDT를 시민들 몸에 거칠게 쏟아붓자 참다못해 글을 쓴 것이었다. 이 시민은 "DDT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뒤집어씌워야만 소독이 될 까닭은 없지 않을까요"라며 "볼품 있게, 좀 더 친절히 뿌려 달라"고 쓴소리를 했다(경향신문 10월 31일자). DDT는 오늘날 맹독성 발암 물질로 판명돼 사용이 전면 금지되고 있지만 과거엔 값싸고 효과 좋은 꿈의 살충제라며 이곳저곳 마구 뿌려댔다. 모기·파리는 물론, 발진티푸스를 옮기는 이(虱)와 벼룩·빈대 등의 박멸에 최고여서 '살충제의 원자폭탄'이라 불렸다. 해방 직후 미군과 함께 DDT가 처음 상륙했을 때, 우리는 이 살충제가 그토록 무서운 것인 줄은 전혀 몰랐다. 방역 요원들은 남한으로 내려온 북한 난민들부터 이·벼룩으로 고통받는 초등학생들에게까지 허연 DDT 가루를 온몸에 뿌렸다. 거의 'DDT 목욕'을 시켜준 셈이었다.
1950년대부터는 여름이 되면 열흘에 한 번꼴로 DDT를 항공 살포했다. 엔진의 굉음과 함께 비행기가 상공에 나타나면 하늘에선 뽀얀 DDT 안개비가 내렸다. 살포 때마다 "누에나 꿀벌에게 피해 없도록 하라"는 안내는 있었지만 사람 몸에 맞지 않게 주의하라는 말은 없었다. 오히려 1959년 8월 서울 시내에 맹독성 DDT를 공중 살포할 때 보건사회부는 "일반 가정에서는 방문을 활짝 열어 약 기운이 방 안에 들어가도록 하라"고 당부하기까지 했다. 그 시절 DDT란 생활필수품이었다. 집안 곳곳, 심지어 부엌에도 DDT 가루를 뿌렸다. 손 뻗으면 닿는 곳에 DDT가 있다 보니 소녀가 잘못 마셔 사망하고, 국에 넣어 먹었다가 3남매가 중태에 빠지는 등 사고가 잇따랐다.
그래도, 나라를 일으켜 가던 시절의 한국인에게 DDT는 너무나 고마운 존재였다. 1949년 2만5900명이나 발생했던 콜레라·이질·장티푸스·디프테리아 환자가 1957년엔 1883명으로 급감하게 만든 일등공신이 DDT였다. 이 살충제 덕분에 이·벼룩·빈대는 우리 주위에서 거의 자취를 감췄다. 그러나 1960년대 후반부터 서구에서 DDT의 발암성이 문제 되기 시작됐고, 1969년엔 미국이 사용을 금지했다. 우리 농림부도 1972년 6월 19일 DDT 사용을 전면 금지한다고 밝혔다(조선일보 1972년 6월 20일자).
1946년 10월 '영등포의 한 주민'이 자못 준엄한 어투로 보건 당국을 꾸짖는 글을 신문에 기고했다. 미 군정청 요원들이 전염병 예방을 위해 살충제 DDT를 시민들 몸에 거칠게 쏟아붓자 참다못해 글을 쓴 것이었다. 이 시민은 "DDT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뒤집어씌워야만 소독이 될 까닭은 없지 않을까요"라며 "볼품 있게, 좀 더 친절히 뿌려 달라"고 쓴소리를 했다(경향신문 10월 31일자). DDT는 오늘날 맹독성 발암 물질로 판명돼 사용이 전면 금지되고 있지만 과거엔 값싸고 효과 좋은 꿈의 살충제라며 이곳저곳 마구 뿌려댔다. 모기·파리는 물론, 발진티푸스를 옮기는 이(虱)와 벼룩·빈대 등의 박멸에 최고여서 '살충제의 원자폭탄'이라 불렸다. 해방 직후 미군과 함께 DDT가 처음 상륙했을 때, 우리는 이 살충제가 그토록 무서운 것인 줄은 전혀 몰랐다. 방역 요원들은 남한으로 내려온 북한 난민들부터 이·벼룩으로 고통받는 초등학생들에게까지 허연 DDT 가루를 온몸에 뿌렸다. 거의 'DDT 목욕'을 시켜준 셈이었다.
1950년대부터는 여름이 되면 열흘에 한 번꼴로 DDT를 항공 살포했다. 엔진의 굉음과 함께 비행기가 상공에 나타나면 하늘에선 뽀얀 DDT 안개비가 내렸다. 살포 때마다 "누에나 꿀벌에게 피해 없도록 하라"는 안내는 있었지만 사람 몸에 맞지 않게 주의하라는 말은 없었다. 오히려 1959년 8월 서울 시내에 맹독성 DDT를 공중 살포할 때 보건사회부는 "일반 가정에서는 방문을 활짝 열어 약 기운이 방 안에 들어가도록 하라"고 당부하기까지 했다. 그 시절 DDT란 생활필수품이었다. 집안 곳곳, 심지어 부엌에도 DDT 가루를 뿌렸다. 손 뻗으면 닿는 곳에 DDT가 있다 보니 소녀가 잘못 마셔 사망하고, 국에 넣어 먹었다가 3남매가 중태에 빠지는 등 사고가 잇따랐다.
그래도, 나라를 일으켜 가던 시절의 한국인에게 DDT는 너무나 고마운 존재였다. 1949년 2만5900명이나 발생했던 콜레라·이질·장티푸스·디프테리아 환자가 1957년엔 1883명으로 급감하게 만든 일등공신이 DDT였다. 이 살충제 덕분에 이·벼룩·빈대는 우리 주위에서 거의 자취를 감췄다. 그러나 1960년대 후반부터 서구에서 DDT의 발암성이 문제 되기 시작됐고, 1969년엔 미국이 사용을 금지했다. 우리 농림부도 1972년 6월 19일 DDT 사용을 전면 금지한다고 밝혔다(조선일보 1972년 6월 20일자).
한 시절 추억으로 남은 줄만 알았던 'DDT'가 몇 십 년 만에 뉴스에 다시 등장했다. 계란 속 살충제를 조사하다 보니 DDT까지 나온 것이다. 검출량이 기준치 이하로 밝혀졌는데도 상당수 시민이 불안해한다. 정부가 21일 "살충제 피프로닐에 최고 농도로 오염된 계란을 하루 2.6개씩 평생 먹어도 안전하다"고 발표했는데도 많은 국민은 안심하지 못하고 있다. 60~70년 전 정부가 'DDT는 인축(人畜)에 무해하다'고 했을 때 국민은 의심 없이 받아들였지만, 오늘의 대중은 다르다. DDT의 독성에 대한 무신경 못지않게, 과도한 공포심을 갖는 것 역시 비합리적 태도임을 머리로는 이해하겠는데도 불안감을 떨치지 못한다. 그건 아마도 맹독성 살충제를 베이비파우더처럼 온몸에 바르며 살았던 지난 세월의 부끄러운 기억이 잔류 농약처럼 우리 가슴에 남아있기 때문인지 모른다.
'김명환 外 시간여행·문학 기행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경찰 간부가 署에서 굿판 벌였던 시절… (0) | 2019.01.24 |
---|---|
'종교적 병역 거부' (0) | 2019.01.09 |
해장국 골목 점령 (0) | 2018.12.31 |
村老들, 햅쌀·산삼 등 (0) | 2018.12.26 |
'탈모비누' (0) | 2018.12.24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