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환의 시간여행] "가발 수출 위해 머리 기르기 운동을"… 부모들 "내 딸이 앙골라 토끼냐" 항의
입력 2017.11.22 03:10
"수출을 위해서 학생들 머리를 기르게 하자고요?"
1966년 4월 22일 가발 수출 회사들이 상공부에 제출한 색다른 '건의'를 놓고 관계자들은 쓴웃음을 지었다. "가발 원료인 모발이 귀해지고 있으니 전국 초·중·고와 대학의 여학생 276만여명을 대상으로 '머리 기르기 운동'을 전개해 달라"는 것이었다. 정부는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냐'는 식의 반응을 보였다. 조선일보도 '근대화를 지향하는 수출에 복고조의 장발 운동이 필요하다니…'라고 꼬집었다(1966년 4월 24일자).
그래도 업자들은 여학생들 머리칼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않았다. 1966년은 한국 가발 수출이 절정을 맞고 있을 때였다. 당시 미국 가발 수입 물량의 3분의 1이 한국산이었다. 우리나라 수출 품목에서 가발은 합판·스웨터에 이어 수출 실적 제3위의 '효자'였다. 그러나 너도나도 뛰어들어 만들다 보니 '원자재'인 머리칼이 갈수록 구하기 어려워졌다. 다급해진 업계는 인도네시아 등지에서 인모(人毛) 수입도 추진했다. 어떤 업체는 돼지털을 섞어 가발을 만들었다가 검찰에 구속되기도 했다.
1968년 6월 열린 한국가발수출조합 이사회는 2년 전 상공부에 건의했다가 퇴짜 맞은 '여학생 머리 기르기 운동 추진'이란 카드를 다시 꺼내 들었다. 그해 9월 부산의 3개 가발 업체는 시내 여학교 교장들을 초청해 공장을 견학시킨 후 "수출 증대를 위해 여학생들 머리카락을 7㎝만 더 기르게 해 달라"고 간곡히 요청했다. 그러나 이런 사실이 알려지자 난리가 났다. 상당수 학부모가 분노하며 "우리 딸이 앙골라 토끼냐"고 반발했다. 털을 채취하기 위해 기르는 동물로 취급하느냐는 불만이었다. 한 신문 칼럼은 '신체발부(身體髮膚)는 부모에게서 받은 것이니 이를 함부로 다치지 않도록 조심하는 것이 효도의 시작'이라는 공자 말씀까지 거론하며 "사람을 철저하게 상품 원료로 다루려는 태도에 놀라움을 금할 수 없다"고 목청을 높였다. '앙골라 소동'이라고 명명된 이 논란 이후 머리 기르기 운동이 실제로 벌어졌다는 보도는 찾을 수 없다. 그 대신 수요 공급의 법칙에 따라 머리칼 값이 치솟자 서민층 여성들이 너도나도 머리를 싹둑 잘라 내다 팔았다. 병든 아버지를 위해 긴 머리를 자른 '삭발 효녀', 휴가 나온 아들에게 쌀밥을 먹여 주려고 머리칼을 자른 '삭발 모정'이 속출했다. 기다란 댕기 머리는 한 번 끊으면 쌀 한 가마 값이 나왔다. 수집상들은 방방곡곡을 돌며 머리칼을 사들였다. 어떤 수집상은 미용사와 함께 다니며 시골 처녀에게 "서울의 최신 유행인 파마머리를 공짜로 해 주겠다"고 꾀어 파마해 주고 머리칼을 자르는 아이디어도 구사했다. 한때 서울 종로 5가 등지엔 모발 수집상과 중간 상인들이 거래하는 '인모(人毛) 시장'이 열려 증권시장 못지않게 북적거렸다.
갖은 곡절을 겪어온 우리 가발 산업은 사양화의 길을 걸은 적도 있지만, 요즘에 활력을 되찾아 세계시장에서 한국 제품이 인기라고 한다. 탈모 인구의 증가로 내수 시장도 늘 고 있다. 초창기엔 여종업원들의 꼼꼼한 손놀림이 경쟁력이었던 한국 가발 산업은 오늘엔 3차원 스캐닝 등 신기술과 디자인을 내세운다. 반세기 전엔 우리 머리칼을 잘라 미국인들이 쓸 가발을 만들었지만, 이제 한국 가발 업체들은 공장 자체를 중국·미얀마 등지로 많이 옮겼다. 지금 그 나라 여성들도 옛 시절 우리 어머니, 누이 같은 마음으로 머리칼을 팔고 있을까.
1966년 4월 22일 가발 수출 회사들이 상공부에 제출한 색다른 '건의'를 놓고 관계자들은 쓴웃음을 지었다. "가발 원료인 모발이 귀해지고 있으니 전국 초·중·고와 대학의 여학생 276만여명을 대상으로 '머리 기르기 운동'을 전개해 달라"는 것이었다. 정부는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냐'는 식의 반응을 보였다. 조선일보도 '근대화를 지향하는 수출에 복고조의 장발 운동이 필요하다니…'라고 꼬집었다(1966년 4월 24일자).
그래도 업자들은 여학생들 머리칼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않았다. 1966년은 한국 가발 수출이 절정을 맞고 있을 때였다. 당시 미국 가발 수입 물량의 3분의 1이 한국산이었다. 우리나라 수출 품목에서 가발은 합판·스웨터에 이어 수출 실적 제3위의 '효자'였다. 그러나 너도나도 뛰어들어 만들다 보니 '원자재'인 머리칼이 갈수록 구하기 어려워졌다. 다급해진 업계는 인도네시아 등지에서 인모(人毛) 수입도 추진했다. 어떤 업체는 돼지털을 섞어 가발을 만들었다가 검찰에 구속되기도 했다.
1968년 6월 열린 한국가발수출조합 이사회는 2년 전 상공부에 건의했다가 퇴짜 맞은 '여학생 머리 기르기 운동 추진'이란 카드를 다시 꺼내 들었다. 그해 9월 부산의 3개 가발 업체는 시내 여학교 교장들을 초청해 공장을 견학시킨 후 "수출 증대를 위해 여학생들 머리카락을 7㎝만 더 기르게 해 달라"고 간곡히 요청했다. 그러나 이런 사실이 알려지자 난리가 났다. 상당수 학부모가 분노하며 "우리 딸이 앙골라 토끼냐"고 반발했다. 털을 채취하기 위해 기르는 동물로 취급하느냐는 불만이었다. 한 신문 칼럼은 '신체발부(身體髮膚)는 부모에게서 받은 것이니 이를 함부로 다치지 않도록 조심하는 것이 효도의 시작'이라는 공자 말씀까지 거론하며 "사람을 철저하게 상품 원료로 다루려는 태도에 놀라움을 금할 수 없다"고 목청을 높였다. '앙골라 소동'이라고 명명된 이 논란 이후 머리 기르기 운동이 실제로 벌어졌다는 보도는 찾을 수 없다. 그 대신 수요 공급의 법칙에 따라 머리칼 값이 치솟자 서민층 여성들이 너도나도 머리를 싹둑 잘라 내다 팔았다. 병든 아버지를 위해 긴 머리를 자른 '삭발 효녀', 휴가 나온 아들에게 쌀밥을 먹여 주려고 머리칼을 자른 '삭발 모정'이 속출했다. 기다란 댕기 머리는 한 번 끊으면 쌀 한 가마 값이 나왔다. 수집상들은 방방곡곡을 돌며 머리칼을 사들였다. 어떤 수집상은 미용사와 함께 다니며 시골 처녀에게 "서울의 최신 유행인 파마머리를 공짜로 해 주겠다"고 꾀어 파마해 주고 머리칼을 자르는 아이디어도 구사했다. 한때 서울 종로 5가 등지엔 모발 수집상과 중간 상인들이 거래하는 '인모(人毛) 시장'이 열려 증권시장 못지않게 북적거렸다.
갖은 곡절을 겪어온 우리 가발 산업은 사양화의 길을 걸은 적도 있지만, 요즘에 활력을 되찾아 세계시장에서 한국 제품이 인기라고 한다. 탈모 인구의 증가로 내수 시장도 늘 고 있다. 초창기엔 여종업원들의 꼼꼼한 손놀림이 경쟁력이었던 한국 가발 산업은 오늘엔 3차원 스캐닝 등 신기술과 디자인을 내세운다. 반세기 전엔 우리 머리칼을 잘라 미국인들이 쓸 가발을 만들었지만, 이제 한국 가발 업체들은 공장 자체를 중국·미얀마 등지로 많이 옮겼다. 지금 그 나라 여성들도 옛 시절 우리 어머니, 누이 같은 마음으로 머리칼을 팔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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