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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것의 기록들

청계천( 淸溪川)

by 까망잉크 2021. 10. 7.

청계천淸溪川

淸溪川  개천(開川)

  • 요약 총길이 5.84km, 하루 물 소비량은 12만t이다. 청계천은 서울을 도읍으로 정한 조선시대부터 정비가 시작되었다.
  • ‘개천’이라는 이름이 ‘청계천’으로 불리기 시작한 것은 일제강점기 때였다. 방치되어 있던 청계천은 1925년부터 종로구 신교동에서 도렴동까지, 1937년에는 태평로에서 무교동 구간이 복개되었다. 이후 1955년 광통교 상류를 시작으로 1970년∼1977년 청계 8가에서부터 신답철교까지 또다시 복개되었다.
    1960~70년대 근대화의 상징이었던 청계천은 자연환경과 역사문화를 복원한다는 취지로 복원사업이 시작되었다. 복원 구간은 태평로에서 신답철교까지이며, 공사는 2003년 7월부터 2005년 9월까지 약 3,900억원을 투입하여 진행되었다. 청계천 복원으로 청계천은 새로운 모습으로 탈바꿈했다.
  • '개천(開川)은 '내를 파낸다'는 뜻으로 하천을 정비하는 토목공사의 이름이었는데 이를 계기로 청계천을 '개천'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1441년(세종 23)에는 홍수를 예방하기 위해 마전교(馬前橋) 서쪽 수중(水中)에 눈금을 새긴 수표(水標)를 세워 개천의 수위를 측정할 수 있도록 했다. 1759년에는 영조가 준천을 관리하기 위해 준천사(濬川司)를 설치하고 이듬해부터 본격적으로 정비를 했다.1955년 광통교 상류 약 136m, 1958년 5월∼1961년 12월 광교에서 청계6가 동대문운동장까지, 1965년∼1967년 청계 6가에서부터 청계8가 신설동까지, 1970년∼1977년 청계 8가에서부터 신답철교까지 복개되었다. 또한 광교부터 마장동까지 총길이 5,6km, 폭 16m의 청계고가도로가 1967년 8월 15일 착공되어 1971년 8월 15일 완공되었다.복원된 청계천은 과거와 달리 물이 부족하기 때문에 한강변 자양취수장에서 물을 퍼올려 뚝도 청정지에서 여과시키고 청계천 아래에 묻힌 관로를 통해 올라오게 한 것이다. 청계천 복원과 함께 2004년 4월 개천의 양쪽에 2차로의 양안도로가 건설되었고, 청계천을 가로지르는 22개의 다리가 건설되는 등 청계천 주변은 새로운 모습으로 탈바꿈했다.
  • 복개되어 정비된 청계천은 1960~70년대에는 근대화의 상징이 되기도 했으나 공구·의류 등 여러 가지 산업이 집중되면서 시설낙후, 공해 등 여러 가지 문제점이 나타나 도시발전의 걸림돌이 되었다. 이에 자연환경을 복원시키고 삶의 질을 높이며, 역사문화를 복원한다는 취지로 청계천 복원사업이 시작되었다. 청계천 복원 구간은 태평로 시점에서 신답철교까지이며, 공사는 2003년 7월부터 2005년 9월까지 2년 3개월에 걸쳐 약 3,900억원을 투입하여 진행되었다.
  • '개천'이라는 이름이 '청계천'이라고 불리기 시작한 것은 일제강점기 때였다. 이 시기에 제대로 관리가 되지 않고 방치된 청계천은 1925년부터 '정비'라는 명목으로 지금의 종로구 신교동에서 도렴동까지, 즉 백운동천·옥류동천·사직동천 등이 복개되었고 1937년에는 태평로에서 무교동 구간이 복개되었다. 1950년대 중반 전쟁이 끝난 후 청계천은 여전히 대표적인 낙후지역이었기 때문에 또다시 복개되기 시작했다.
  • 청계천ⓒ 연합뉴스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 태종은 즉위 초인 1406~07년 청계천의 바닥을 넓히고 둑을 쌓는 등 처음으로 청계천을 정비하기 시작했다. 1411년(태종11) 12월 하천을 정비하기 위한 임시기구로 개거도감(開渠都監, 이듬해 개천도감으로 명칭 변경)을 설치하고, 다음 해부터 대대적으로 정비를 했으며 광통교·혜정교 등 돌다리를 만들었다.
  • '개천(開川)'이라고도 함. 총길이 5.84km, 산책로 12.04km, 하루 물 소비량 120,000톤. 청계천은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상대적으로 지대가 낮은 서울 도심으로 모인 물길이 동쪽으로 흐르다가 살곶이다리 근처에서 중랑천과 합류하여 한강으로 빠져나간다. 자연상태의 하천이었던 청계천은 비가 많이 와서 물이 넘치면 많은 피해를 입었기 때문에 서울을 도읍으로 정한 조선시대부터 정비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청계천 돌다리의 옛 사진과 사연들을 모아 
 

 

      

도성 내에서 가장  다리로 경복궁-

육조거리ㅡ 종루ㅡ 숭례문으로 이어져 남북대로를

연결하는 도성  중심통로였고  주위에는 많은 상가들이

 있어 서울 상업의 중심지 역할을 했고 도성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이 왕래했습니다. 

 

 계란을 파는 가게, 갓을 만드는데 사용되는

대나무를 파는 가게, 갓을 파는 가게, 부인의 머리 장식을

파는 가게, 부인들의 패물과 가락지 등을 파는 가게, 신발을 파는 가게,

물감과 중국 과실을 파는 가게, 칠목기와 장롱을 파는 가게, 잔치 

 그릇을 세놓는 가게, 채소를 파는 가게, 솜을 파는 가게, 말총·가죽·

··휴지·  잡화를 파는 가게, 말안장·등자·굴레 등을

파는 가게, 서화와 책을 파는 가게 등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던 곳이었습니다.

 

 보신각이 있는 종로 네거리에서

을지로 네거리 방향으로 나아가다가 청계로와

만나는 길목에 있고 조선시대 광통방(廣通坊)

있던  다리였으므로  대광통교(大廣通橋)

라고도 했습니다.

 

 

 

조상의 얼이 새겨진  정능의 청계천 돌다리 광통교

  

          

 

중구 수표동 43번지와 종로구 관수동

20번지 사이청계천 위에 놓여 있던 다리로

홍수를 방지하기위해 수심을 측정하는 수표석주

(水標石柱) 세웠는데  지주는 보물 838호로

 지정되어  세종기념회관  안으로

옮겨졌습니다.

 

 


위는 보물 838호로 지정된 수표석주(水標石柱)

아래는 수표교와 함께 촬영된 사진입니다.

 

 

 

아래는 장춘단 공원으로 옮겨진 뒤의 수표교 입니다.

 

 

 

      

중구 장교동 51번지와 종로구 관철동

 11번지 사이 청계천에 놓였던 다리입니다

  일대는 일찍부터 도성  상업의 중심지가 되어

시전상인들이 모여 살던 곳이며, 중앙과 지방 관청의

연락사무를 맡아 보던 경주인(京主人)들의

 본거지였습니다.

 

 

 

 

 

        

 청계천 물줄기가 도성을 빠져 나가는

지점에 놓여 있던 다리로 서울에 성곽을 쌓으면서

청계천 물이 원활하게 흘러갈  있도록 다섯 개의 아치형으로 

 구멍을 만들었고,  위로 성곽을 쌓아 올렸으며, 아치 모양의 구멍을

 서로 연결해서 성벽 안쪽으로 장대석을 연결한 다리입니다.

  

  동대문 옆의 오간수문은 물길이  빠져가기 위해

가설한 다리로 조선시대에는 도성 안에서 죄를 지은 자가

 도성을  빠져 달아나든가 혹은 밤에 몰래 도성 안으로 잠입하는

사람들의 통로로 곧잘 이용되기도 했고 명종  전국적으로 사회를

흉흉하게 만들었던 임꺽정의 무리들이 도성에 들어와

전옥서를 부수고 도망갈 때도 이곳으로 났습니다.

 

 1907 일제가 청계천 물이  흘러가도록

한다는 미명하에 오간수문을 모두 헐어버릴  함께

사라지고 콘크리트 다리로 교체되었다가 후에 성곽이

훼손되면서  자취를 찾아볼  없습니다.

 

 

 밖에 청계천의 모습을 담은 사진을 올립니다.

 

 아래사진은 일제 강점기 경복궁 동편에 옮겨진

광화문인데 청계천에 걸려있는  사진을 감상하시던 분들이

자하 문이라며 얘기를 나누시는 모습을 보고  사진의 사연을

설명했더니 숙연한 모습을 보여 주셨습니다.

 

 

 

 

 

 

 

 

<출 처>: 다음백과,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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