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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역사) 이야기

조선 최고의 벼락 출세자, 유자광 (4)

by 까망잉크 2022. 7. 27.

조선 최고의 벼락 출세자, 유자광 (4)

경복궁 문지기에서 단숨에 재상까지 

by두류산Jul 17. 2022

 조선 최고의 벼락 출세자, 유자광

 - 경복궁 문지기에서 단숨에 재상까지 (4)

 

 파적위(破敵衛)를 거느리고 반군의 토벌에 참전하다

 

 세조 13년 7월 14일, 유자광은 세조의 어찰을 지니고 다시 전선으로 가게 되었다. 

 세조는 도총사 이준에게 보내는 서찰을 통해 속전속결을 지시하였다. 

 유자광은 임금에게 하직 인사를 올리며 청하였다.

 "이번에 북방의 전선에 가면 반드시 큰 전투가 벌어질 터인데 저도 참전하여 역적의 목을 바쳐 전하의 근심을 덜어드리고 싶습니다!”

 세조는 유자광을 격려하고, 전투에 쓸 말과 갑옷을 하사하였다. 

 유자광은 임금이 하사한 말을 타고 북방의 전쟁터로 달렸다. 

 

 세조 13년 7월 14일의 실록 기사에 의하면, 유자광을 북방의 전선으로 보낸 세조는 유자광을 장차 나라의 재목으로 쓰기 위해 예조에 명하여 벼슬길을 터주도록 허통(許通)을 명하였다. 

 허통은 서얼들의 과거 응시를 제한해 관직 등용을 차단하는 제도를 풀어주는 것을 말했다. 

 

 도총사 이준은 속전속결을 지시한 임금의 서찰을 유자광으로부터 전해받고, 총공격령을 내렸다. 

 유자광이 출전을 자원하니, 이준은 유자광에게 하층민 위주로 편성된 부대인 파적위(破敵衛)를 거느리고 출전하게 하였다. 

 ‘적을 격파하는 부대’라는 이름의 파적위는 지리적으로 산악 지대가 많은 조선의 자연조건에 비추어 보병의 확충이 필요하다는 판단에 따라 세조가 새로이 설치한 보병부대였다. 

 

 관군이 모든 힘을 집중하여 총공세를 퍼붓자 반란군은 버티지 못하고 전선에서 퇴각하기 시작하였다. 

 관군은 기세를 몰아 압박하여 이시애의 반군과 거산현(居山峴)에서 마지막 결전을 치르게 되었다. 이시애는 지형이 높고 험한 만령(蔓嶺)에 웅거 하여 2천여 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맹렬히 저항하였다. 

 

 이준이 총통군으로 적진을 공격하여 적의 기세를 꺾어 혼란하게 하고, 산악 지형을 잘 아는 함길도 출신 겸사복들로 하여금 적진 속으로 뛰어들어 적의 방어선을 무너뜨리도록 하였다. 하지만 총통군은 적진에서 활과 화살이 비 오듯이 쏟아지자, 정신을 못 차리고 어찌할 바를 몰라, 허둥지둥 높이 쏘기도 하고 혹은 가로질러 쏘기도 하여, 제대로 적진에 맞히는 일이 없어 아무런 위협이 되지 못했다.  

 

 이준은 전세를 뒤집기 위해 군사를 쪼개어 동쪽 산봉우리를 돌아 적이 포진하고 있는 산봉우리의 좌측 진(陣)에 돌격하게 하였다.  

 좌대장 어유소는 정예군을 차출해 풀과 구분하지 못하도록 푸른 옷을 입혀 위장을 한 후, 배에 태워 산봉우리 뒤쪽으로 상륙시켰다. 어유소의 군사는 벼랑을 따라올라 접근하여 기습적으로 적의 배후를 쳤다. 드디어 유시(酉時, 저녁 6시경) 경 토벌군이 적진의 허를 찔러 한쪽 면(面)을 돌파하였다. 

 반란군은 당황하였고 이에 토벌군은 고함을 지르며 군사들을 몰아 공격해 올라갔다. 군사들은 북을 둥둥 울리고 큰 소리로 부르짖으며 돌격을 하니, 함성소리가 천지를 진동하였다. 드디어 관군이 일제히 산 위의 적을 크게 쳐부수니, 살아남은 적들은 뿔뿔이 흩어지고 이시애는 야음을 틈타 말을 타고 도망하였다. 

 

 유자광이 달아나는 이시애와 반란군을 추격하였으나 이미 어두워져, 이준은 징을 울려 관군의 추격을 중지시켰다. 실록에 의하면, 이시애를 끝내 잡지 못했지만 치열하게 전투를 한 유자광은 땀에 젖은 투구를 한 손에 벗어 들고 한 손으로는 부대의 기(旗)를 높이 들어 외쳤다. 

 "사람이 천지간에 남아로 태어나고, 미천한 몸으로 주상전하의 지극한 인정과 은혜를 입었다. 몸이 변방에서 전투 중에 죽어, 시체가 말가죽에 쌓인 채 고향에 돌아가 묻히지 않는다면 어찌 장부의 삶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토벌군은 함길도 만령 전투에서 수륙양면작전을 사용하여 대승을 거두었다. 

 만령 전투를 묘사한 내용은 고려에서 조선까지 함경도 지역에서 무공을 세운 일화를 모아 그림으로 그리고, 글로 설명해 놓은 그림첩인 북관유적도첩(北關遺蹟圖帖)에서 볼 수 있다. 북관유적도첩은 고려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토벌군이 반란군의 주력부대를 무너뜨리자, 이시애는 길주와 경성(鏡城)을 거쳐 국경 넘어 여진으로 달아나려 했으나 부하들의 배반으로 관군에게 넘겨졌고, 토벌군의 진지 앞에서 공개 처형을 당했다. 이로써 이시애의 난은 3개월 만에 진압되었다. 

 

 유자광은 군대와 함께 함길도에 머물면서 남은 반란세력을 진압하고 지역을 안정시키는 임무를 맡았다. 

 유자광은 포로로 잡힌 반란군과 함길도 백성으로 반란군에 가담한 자들을 여러 명 취조해 보았다. 그들은 그동안 부임해온 고을 수령들에게 극도의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국경지역이라는 특수성으로 고을 수령은 오랑캐 침범에 대응할 수 있는 무장출신들이 부임하였고, 이들은 법을 엄하게 다스려 백성을 죽이는 것을 오랑캐 죽이듯 쉽게 생각하여 원망이 골수에 차 있음을 알게 되었다.   

 

 이즈음 명나라는 만주의 여진족 토벌을 위해 조선이 합세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이에 세조는 강순과 남이 등에 명하여 압록강을 건너 여진족의 본거지를 치게 하였다. 

 유자광은 여진족 토벌을 위해 강순의 휘하 장수로 편입되었다. 유자광은 압록강변인 평안도로 나가기 위해 함길도를 떠나면서 지금까지 현지에서 보고 느꼈던 것을 임금께 보고하는 상소를 올렸다.

 

 유자광의 상소는 세조에게 ‘절세의 인재를 얻었다’는 믿음을 주었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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