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최고의 벼락 출세자, 유자광 (5)
경복궁 문지기에서 단숨에 재상까지
조선 최고의 벼락 출세자, 유자광
- 경복궁 문지기에서 단숨에 재상까지 (5)
이시애의 난이 일어난 원인과 총통군의 문제를 소상히 아뢰다
세조 13년 9월 4일의 실록에 의하면 유자광이 함길도에 있다가 장차 평안도로 나가면서 상소를 올렸다는 기록이 보인다. 유자광의 상소는 다음과 같이 시작된다.
"신(臣)이 유규의 얼자로서 만 번 죽을 것을 무릅쓰고 지난 6월 역적 이시애의 일에 대해 상소를 올렸더니, 전하께서 죄를 묻지 아니하시고 특별히 등용하시어 하루아침에 품계가 4품에 이를 수가 있었습니다. 전하의 큰 은혜에 오직 감격할 따름입니다.
이제 엎드려 듣건대, 겸사복 박의생이 가지고 온 어찰에 신은 강순을 따라 여진을 토벌하라고 명하셨습니다. 신이 나라를 위하여 칼을 들고 적을 크게 호령하려는 마음은 죽은 다음에야 그치기를 원합니다."
유자광은 왜 함길도 백성들이 쉽게 반란군 진영에 가담하게 되었는지 조사한 바대로 임금에게 아뢰었다.
“신이 함길도에 있으면서 백성들을 자세히 살피면서 그들이 왜 반란을 일으켰는지 답을 구하였는데, 지금 신이 함길도를 떠나므로, 감히 상소를 올려 멀리서 성총(聖聰)을 어지럽히니, 엎드려 바라옵건대 헤아려 주시기 바라옵니다.
이시애가 비록 길주의 수령 한 사람을 죽일 수 있었다고 할지라도, 수십 고을의 백성들이 다투어 수령과 향리를 죽이고 이시애를 따라서 반란에 참여한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신이 보건대, 함길도는 산천이 험하고 막히어 조정의 풍습에 대한 교화가 미치지 못하고 경계가 야인(野人)과 닿아있어 민속도 매우 어리석고 미혹한데, 현명한지 아닌지를 가리지 아니하고 모두 무인으로써 고을 수령을 삼았습니다.
그들은 무장으로서 비록 말을 달리고 칼을 써서 오랑캐를 죽이는 일에는 능하여도, 백성들에게 예의를 가르치고, 백성들을 자식과 같이 사랑하며 효도와 우애의 도리를 어찌 가르칠 줄 알겠습니까? 죄인을 기분대로 쉽게 죽이고 백성들을 보기를 흙이나 돌같이 하니, 백성들이 수령을 보는 것도 또한 원수와 같이 하였습니다.
이리하여 일개 역적이 지휘권을 도둑질하니 수십 고을의 백성들이 메아리처럼 응하여 평소 고을 수령에 대한 원망을 갚으려고 하였습니다. 어찌 이들 모두가 애초부터 반역하려던 자들이었겠습니까? 이것은 역적이 백성들의 원망을 이용하여 도적의 계책을 행한 까닭입니다."
유자광은 이 문제에 대해 그동안 생각한 대책도 아뢰었다.
"원컨대 지금부터라도 수령을 임명할 때는 만약 큰 고을인 주·부(州·府)이면 활과 칼을 감싸고 다스릴 수 있는 덕을 갖춘 무인을 택하여 수령으로 삼고, 문과급제 출신을 수령의 부관으로 백성의 잡다한 송사를 처리하는 판관(判官)으로 삼으며, 만약 작은 고을인 군·현(郡·縣)이면 문무의 자질을 겸비한 자를 골라 수령에 임명하여야 한다고 사료됩니다.
판관이 되는 자는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간에 우애하는 도리를 가르치고, 목사가 되는 자는 활과 칼 등 전투의 기술을 가르치고, 관리가 백성들을 자식처럼 사랑하고, 백성들이 관리를 부모처럼 여긴다면, 변경을 방어하는 계책을 얻을 것입니다."
유자광은 이어서 세조가 각별히 중요하게 여기는 총통군에 대해서도 아뢰고, 상소를 마무리했다.
"주상께서 군사를 훈련하여 기른 것이 지금까지 12년으로, 병사들은 용감하고 무기는 단련되었습니다. 신이 거산(居山)의 싸움에서 그 장대한 기운이 스스로 배나 되고 충의의 기운이 세차고 꿋꿋한 것을 보았는데, 옛날에 훌륭한 장수와 병졸도 이보다 더함은 없었을 것입니다.
다만 총통군은 시정잡배나 병사들 중에서 충원하는데, 화살과 돌이 종횡으로 날아다니면, 수족이 거꾸로 놓이고, 총통포의 약실에 화약을 재는 것도 어찌할 줄 모르고, 우왕좌왕하며 높이 쏘기도 하고 혹은 가로질러 쏘기도 하여, 한 개의 화살도 바로 적진에 맞히는 일이 없었습니다. 이러하니 적진을 함몰시키는 데는 총통이 최고이지만, 일백 개의 총통을 일제히 발사한다고 하더라도 적진을 함락시키는 데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원컨대 총통의 군졸을 미리 뽑아서, 평상시에 총통 쏘는 것을 익히고 훈련하여서, 위급할 때 제대로 활용할 것에 대비하소서."
세조는 유자광의 상소에서 말한 대책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세조는 어세공을 함길도 관찰사로, 허종을 함길북도 병마절도사로, 이종을 함길남도 병마절도사로 임명하였다. 주로 무신이 맡은 함길도의 관찰사와 병마사를 유자광의 계책을 적극 반영하여 모두 문신이거나 문무의 자질을 겸비한 자로 대체하였다.
또한 유자광을 총통장(銃筒將)으로 임명하여 총통군 훈련을 맡겼다.
세조는 유자광이 절세의 인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천민 출신이라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어 중요한 자리에 등용하기가 어려운 것이 안타까웠다.
세조는 유자광을 중용하면 나라와 사직을 위해 큰 역할을 할 인재라는 믿음이 있었다. 세조는 과감히 유자광을 무인들의 인사를 담당하는 정 5품 병조정랑에 임명하였다. 오늘날 국방부 인사국장 정도의 자리이다.
유자광은 하급 무인인 갑사 신분에서 3개월 만에 정 5품 병조정랑으로 벼락출세를 한 것이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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