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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역사) 이야기

조선 최대의 뇌물사건 (3)

by 까망잉크 2022. 9. 24.

 

조선 최대의 뇌물사건 (3)

고인 물은 썩게 마련이며, 윗물이 흐리면 아랫물도 흐린 법이다 

by두류산Sep 04. 2022

대신들의 탐욕을 역사에 기록하여 심판하였다

 대간들은 정승들이 어전에 나아가 임금에게 변명만 늘어놓았다는 소식을 듣고 탄식하였다. 그들은 뇌물을 받은 대신들의 죄가 이대로 덮어지는 것이 안타까웠다. 

“김주를 잡지 못했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김주를 잡고 그가 작성한 장부도 드러났으니, 마땅히 진상을 조사해서 죄를 물어야 할 것이 아닌가? 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부끄러움을 아는 풍속을 장려할 수 있을 것인가?”세조의 즉위를 도운 훈구대신들이 공신이 되어 조정을 차지한 지가 20년이 지났다. 고인 물은 썩는 법이다. 훈구대신들은 재물을 탐하여 꺼림이 없이 행동하였다. 이미 성종 즉위 5년에 사헌부 지평 채수가 이를 지적하며 임금에게 아뢰었다.

“고려 말에 선비의 기풍이 크게 무너졌었는데, 세종 때에 이르러 다시 떨치었습니다. 그러다가 세조 때 이후로 기강이 없어져서 훈구대신들이 제멋대로 거리낌 없이 탐오하고 절제를 모르는 자가 많이 있습니다.” (성종실록, 재위 5년 3월 22일)

 실록은 훈구대신들이 재물에 탐욕을 부린 사실을 그대로 전하고 있다. 세조를 도와 정난공신으로 영의정까지 지냈던 정인지는 재물을 좋아하여 수만 석이 되었는데도 이웃 사람의 집까지 빼앗아 원성이 자자했고, 원상 최항은 사위를 볼 때 인품은 안 따지고 집에 재물이 많은지만 따졌다 하고, 양성지는 아예 별호가 동전 냄새 풍기는 '동취(銅臭)'라고 불렸다고 하며, 나랏일만 근심하고 재물에는 초연한 그런 대신들은 찾아보기가 어려웠다고 사관들이 탄식했다. (성종실록, 재위 5년 4월 28일, 9년 11월 26일, 13년 6월 11)

 

 윗물이 흐리면 아랫물이 흐리듯이 고위직 훈구대신들의 부패와 탐오로 조정의 풍습이 맑지 못했다. 새로 벼슬길에 오른 조정의 젊은 관리들은 이를 안타깝게 여겼다.

대사간 최한정과 사간원의 관리들은 김주의 장부를 입수하여 살펴보고, 뇌물을 받은 대신들을 강력히 성토하며, 재상들의 파직을 청하는 상소를 올렸다.   

 “김주의 장부에 ‘현풍의 김 정승에게 들깨 두 섬’이라고 적은 것은 필시 김질을 지칭하는 것이고, ‘김 정승에게 들깨 한 섬과 종에게 노자로 지급한 쌀 두 말 닷 되’라고 적은 것은 반드시 김국광일 것입니다. 지난번 경연에서 대간들이 김주가 준 물건을 모두 몰수하기를 청하니, 전하께서 좌우를 돌아보고 물으셨는데 김국광은 끝내 한마디 말이 없더니, 이 때문에 입을 닫고 있었던 것입니다.” 

승지는 사간원이 올린 상소를 받쳐 들고 입시하였다. 임금은 상소를 펼쳐서 읽었다.  

 “한명회와 김국광과 김질은 다 나라의 대신이니, 녹(祿)을 충분히 받고, 부귀도 극진합니다. 국가에서 존중하고 사민(士民)이 함께 우러러보니 청렴하고 스스로 근신해야 마땅한데 탐욕이 한이 없어 이런 수치를 겪게 되었습니다. 이를 그대로 두고 문책하지 않으니, 고을의 수령들 중에 김주와 같이 백성들에게 악한 일을 하여 대신들에게 뇌물을 보내는 자가 많습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받은 물건을 몰수하고 모두 파직하여 뒷사람을 경계하게 하소서.” (성종실록, 재위 7년 12월 6일)

대간들의 탄핵이 거세게 자신을 겨누자, 한명회가 어전에 나아와 변명하였다. 

 “신의 이름이 김주의 장부에 적혀 있으니 신의 죄는 죽어 마땅합니다. 그러나 김주의 아비와 신은 육촌 간이고 이웃에 살기 때문에 서로 친하게 지냈는데, 김주가 전에 형인 김지(金漬)의 집으로 물건을 보내어 신에게 전하였으나 신의 아내가 도리에 맞지 않는다고 거절하며 신에게 말하여, 신도 같은 생각으로 물리쳤습니다. 김지에게 물으면 드러내어 밝힐 수 있을 것입니다.” (성종실록, 성종 7년 12월 7일) 

광산 부원군 김국광도 어전에 나와 대간의 탄핵으로 짐짓 사직을 청하며 변명하였다.  

 "신이 전일 윤사흔과 함께 경연에 입시하였을 때에, 대간이 김주의 일을 아뢰니, 성상께서 신들을 보고 물으셨는데, 윤사흔이 죄다 대답하였으므로 신은 감히 다시 군더더기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김주의 장부에 김 정승에게 들깨 한 섬이라고 한 것이 있는데, 신이 비록 받지는 않았으나, 김주가 신의 장모 집에 보냈을는지도 모르므로 사람을 시켜 가서 물어보게 하였는데, 그 사람이 아직 신에게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의심스러운 즈음에 또한 어찌 감히 대답하겠습니까? 이제 듣건대, 신이 시원하게 대답하지 못하므로 반드시 그 물건을 받았으리라고 대간들이 탄핵을 하니, 신은 피혐(避嫌)하기를 청합니다.” (성종실록, 재위 7년 12월 8일) 

 피혐은 사헌부와 사간원 등에서 잘못이나 죄과에 대해 탄핵을 받은 벼슬아치가 벼슬을 유지하는 것을 피하던 일을 말한다. 조정의 관리들은 대간들에게 탄핵을 당하면 혐의가 풀릴 때까지 벼슬을 사직하는 것이 관례였다. 

 대신들 이하 조정의 거의 모든 신하들이 연루된 조선 최대의 뇌물사건은 대간들의 강력한 성토가 있었으나, 마침 사면령이 내려 연루된 자들이 처벌을 받지 않고 마무리되었다. 

 김주는 뇌물로 착복한 모든 재물이 관청에 몰수되고 뇌물 받은 관리 명단인 장리에 기록되어 장차 그의 자손은 과거에 나설 수 없게 되었다. 하지만 사면령을 이미 내린 덕분에 뇌물을 받은 사람들은 아무도 처벌되거나 받은 재물이 몰수되지 않았다. 그들은 당대에는 사면령 덕분에 참담한 처벌을 면했으나 역사는 그들의 탐욕과 몰염치를 오래 기억하고 그 죄를 물었다.

사관은 한명회가 숨졌을 때 그가 재물을 탐한 죄를 역사에 남겼다. 

 ‘한명회는 재물을 탐하여, 토지와 노비, 보화 등의 뇌물이 잇달았고, 크게 집을 짓고 첩을 많이 두어 사치스럽고 호화롭게 지낸다는 더러운 명성이 일시(一時)에 떨쳤다.’ (성종실록, 재위 18년 11월 14일, 한명회의 졸기) 

사관은 또한 김국광이 죽었을 때 그의 탐욕을 논평하며 역사에 기록하여 남겼다. 

 ‘오랫동안 병조의 일을 관장하니, 집 뜰이 찾는 사람으로 시장과 같았고, 집안이 크게 부유하게 되었으며, 아우 김정광과 사위 이한이 모두 뇌물죄를 얻어 몰락하였다. 재상이 되어 대간에게 여러 번 논박을 받았는데, 주상 또한 그 간악함을 알았다.’ (성종실록, 재위 11년 11월 11일 김국광의 졸기)

 

 

 

오늘날에 있어서도 다시 읽고 새길만한 실록의 기록이다.

 “재상이 비록 요구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김주가 보낸 물건을 받았으면 마땅히 돌려보내야 했습니다. 받고서 돌려보내지 않은 것 자체가 이미 옳지 않은 일입니다. 뇌물을 받은 자들의 마음을 살펴보면 재물을 탐하는 마음이니, 뇌물을 준 자의 죄질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성종실록, 재위 7년 11월 22일, 2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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