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김명환 外 시간여행·문학 기행기

[김명환의 시간여행] [7] 중고생 탈선 공간 돼 버린 분식센터… '지미카터 분식' 상호, 국회서도 논란

by 까망잉크 2022. 10. 6.

[김명환의 시간여행] [7] 중고생 탈선 공간 돼 버린 분식센터… '지미카터 분식' 상호, 국회서도 논란

김명환 사료연구실장
입력 2016.02.24 03:00
 

1969년 7월 9일 충무로에 문 연 '월하(月下)의 집'이란 분식집에 첫날부터 인파가 구름처럼 몰렸다. 영화배우 100여 명이 운영한다는 곳이기 때문이었다. 톱스타 신영균, 최은희가 음식을 서빙한 개업 날 라면 680그릇이 팔렸다. 배우들이 라면집을 차린 건 그해 시작된 정부의 '분식센터' 설립 정책에 영화계도 동참한다는 몸짓이었다. 1969년 초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남대문 여성회관을 비롯해 도심 곳곳에 분식센터가 탄생했다. 국수와 빵 종류만 파는 이 식당은 3공화국이 밀어붙인 쌀 절약 정책의 전진기지 같은 곳이었다. 한 해 300만~600만 석의 쌀이 모자랐던 1960년대에 혼·분식 정책의 강도는 상상 이상이었다. 매주 수·토요일은 '무미일(無米日)'로 정해 모든 식당의 쌀밥 판매를 금했다. 이를 어기다 걸린 식당은 3개월 안팎의 영업정지를 당했다. 유신 직후인 1972년 12월 3일엔 '새마을 식생활개선 합창대회'까지 열렸다. 지정곡은 '즐거운 혼·분식의 노래'였다. 불교 19개 종단은 1973년 6월 23일 '부처님에게 바치는 공양도 빵과 잡곡으로 한다'고 결정했다.(조선일보 1973년 6월 28일 자) 무미일엔 식당의 설렁탕에도 팥, 좁쌀, 수수, 보리를 섞은 잡곡밥만 말아 제공하게 하자 시민들은 "차라리 국수, 빵이 낫겠다"며 분식센터로 몰렸다. 분식센터는 날로 늘어 1971년엔 서울에만 280여 곳이 됐다.

교복 차림 중·고교생들에게‘점령’된 1970년대 서울 종로의 대형 분식센터. DJ가 뮤직박스에서 음악을 틀어주고 있다.

그러나 탄생 2년여 만에 분식센터는 점점 변질되기 시작했다. 청소년들, 그것도 '좀 노는' 학생들의 집합소가 되어 갔다. 신문은 '유방을 거의 드러낸 문짝만 한 크기의 여자 사진'을 걸어 놓고 있는 광화문, 종로 등 대형 분식센터의 실태를 고발했다. 이런 공간에선 교복 차림의 남학생들이 술·담배를 하고, 긴 머리를 풀어 내린 여고생들은 깔깔거리며 일렉트로닉 음악에 맞춰 몸을 흔들었다. 일부 고교는 극장, 술집, 당구장과 함께 '분식센터'를 '학생 출입 금지 구역'으로 지정했다. 이 무렵의 분식센터들은 가게 이름부터 달라졌다. '낙원분식장려관' 등 초기의 점잖은 이름 대신 '미쓰킴 분식센터'처럼 튀어 보이는 간판을 앞다퉈 달았다. 1977년엔 '지미카터 분식센터'까지 등장했다. 국회에서 어느 의원이 "외국 국가원수 이름을 분식집 이름에 쓰도록 허가해 준 건 뭐냐"고 문제 삼는 바람에 이 업소가 영업정지를 당했다. 그러나 사태는 이내 반전됐다. 문제의 식당 주인이 의원을 찾아가 자신이 그 의원 지역구의 '영향력 있는' 주민임을 은근히 알리며 항의하자 난처해진 의원은 이번엔 그 음식점을 선처해 달라고 당국자에게 부탁하는 촌극을 빚었다.(경향신문 1977년 10월 29일 자)

말 많고 탈 많던 분식센터는 1970년대 중반부터 설립 명분 자체가 흔들리게 된다. 쌀이 남아돌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결국 1976년 분식 정책이 중단됐고, 1986년엔 혼·분식 장려 정책이 공식 폐지된다. 쌀은 오늘날에도 너무 많이 남아돌아 고민이다. 지난주 보도에 따르면 정부가 사상 처음으로 쌀 1만8천t을 사료용으로 업체에 팔기로 했다고 한다. 없어서 못 먹던 쌀을 이젠 가축들도 먹는다. 격세지감도 이런 격세지감이 없다.

 

조선일보

댓글